제1~7 시집 수록 시편/제4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2013]

[서평] 김주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무한가변의 집을 꿈꾸다 / 박옥춘

김주완 2013. 12. 27. 18:58

 

[서평] 김주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문학의 전당, 2013)

『시인동네』2013 겨울호(Vol.31) p.p. 221~235 수록

 

 

 

 

자연의 얼굴

 

 

 

 

박옥춘(2005년 『문학사상』평론 등단)

 

 

 

“인간이란 자연 속에서 무엇인가. 무한에 비하면 허무, 허무에 비하면 전체,

허무와 전체 사이에 걸려 있는 중간자이다.”

“이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파스칼, 『팡세』

 

 

 

  구름과 바람, 파도 소리와 소라 껍데기, 가을 오후와 바위, 자라와 잉어, 뻐꾸기 둥지와 붓꽃, 돌부리와 조약돌, 해무와 겨울 대숲……, 자연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한때 자연은 ‘있으라’는 신의 부름에 응하는 말씀의 체현(‘그대로 되니라’)이며, 신의 얼굴을 비추는 다면체의 거울이었다.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신의 속성이 자연 속에 체계적이며 조화롭게 편만했다. 그러나 신 중심의 시대를 지나고 인간 중심의 시대에 자연은 인간의 행복과 편리를 위한 자원이자 도구였다. 신비한 빛은 가려지고 물질적 속성만이 가치의 척도가 되었다. 물질문명이 성취한 현대라는 인공낙원에서 자연은 오히려 생경함으로 위락적(慰樂的) 기능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같이 자연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사회의 가치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수용되어 왔지만 그것은 아전인수 격의, 혹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해석일 따름이다. 자연은 다만 묵묵히,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운행하면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일찍이 파스칼은 자연을 이중의 무한성을 지닌 세계라고 간파했다. 즉 자연은 광대무변한 우주(대의 무한)와 사물의 근원과 종극(소의 무한)에 걸쳐 있는 두 무한의 세계다. 최첨단의 과학기술이 이 무한의 거리를 좁히려 들지만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새 발자국을 더는 격, 이 이중의 무한성 앞에서 유한적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불가능을 자각하고, 두 무한의 중간만을 더듬어 알 뿐이다. 두 무한을 표류하면서 중간의 외양만을 보며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특수성이 이 무력함에서 구제한다. 육체와 정신의 결합인 인간은 자연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난해한 문제적 존재이다. 인간의 육체는 자연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자연의 일부임을 증명한다. 그에 비해 정신은 인간의 인간다움, 다른 자연물과 구별해주는 유일한 차이이며, 그로 인해 인간은 자연의 부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깊이 성찰하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그러나 광막한 자연, 두 무한 사이에 처한 인간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는 시인이 아닐까. 시인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비참과 위대(偉大), 불가능과 가능을 오가는 존재임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시인은, 신의 얼굴을 반사하는 자연의, 얼굴을 되비치는 거울이다. ‘얼굴’과 ‘거울’의 공통적 ‘ㅓ’ ‘ㅜ’의 음가(音價)가 우리를 조용히 명상으로 이끈다. 목 안을 깊이 공명하는 소리가 자연의 면면을 떠올려 보낸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연-인간-신’을 아우러는 삼각 만화경이다. 만화경 속의 색지 조각은 때때로 신의 뒷모습을, 자연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환상과 실체를 오가는 자연의 얼굴을 만들었다 흩었다…….

 

 

 

무한가변의 집을 꿈꾸다 : 김주완,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해무> <바람이 끈이다> <가을 안개가 지나는 왜관 점경> <겨울 원행>의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은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거나 자연과의 교감, 그 속에서의 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철학과 시, 존재와 말에 대해 일생 동안 연구해온 그의 이력이 오성(悟性)과 몽상 사이를 오간다. 예지와 열정 사이에서의 주저함[“부조(浮彫)를 벗어나도 날지 못하겠다 뒤뚱거리겠다”-「내 안의 철새 2」], 한편 많은 연작시의 흔적과, 분방한 상상력과 말의 운용은 시인의 ‘시-본향’에 대한 사랑을 증거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었다가 감옥이 되는, 인간-말(언어)의 지복과 천형은 그대로 시인의 운명이다. “나는 이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말집이 없어 갇히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자유다 낡을 일이 없다”(「집 14-존재의 집」) . 그가 지향하는 ‘말집’은 구름의 집(「집 13-구름의 집」)이다. ① 그 집은 높고 가볍다 ② 그 집은 정해진 자리가 없다 ③ 무한가변, 수시로 바뀐다 ④ 무위, 무욕의 소요하는 집이다. 무한가변을 꿈꾸는 뒤척임 속에서 자연이 호명되어진다. 자연의 얼굴에는 시인의 시간-‘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이 매일반인 평면화된 시간 의식-이, 시간 속의 아버지, 어머니, 고향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밤마다 아비는 들판 자욱한 참대 밭을 꿈꾸었다. 하늘 끝을 찌르는 아름드리 대나무의 송곳 같은 외줄기들, 쳐다보면 바소꼴 댓잎 사이 먼 하늘이 푸른 물무늬가 되어 아득하니 현기증을 일으키는 꿈이었다. 들판 가득 칼바람 몰려와도 잠시 건들건들 몸 흔들어, 조각낸 바람을 흩어버리는 의연한 기상이 절절히 그리운 날밤이었다.

 

 

대낮에도 아비 눈엔 참대 밭이 선했다. 참대처럼 꼬장꼬장 허리 펴고 살았다. 사람들의 곁눈질도 상관 않았다. 참대가 된 아비는 말이 아닌 몸으로 자존(自尊)하였다. 은자(隱者)가 되었다.

 

 

새벽들에 나갈 때마다 이리저리 참대 순을 찾아 살폈다. 덩덕새머리 풀숲을 헤집고 설핏 나온 참대 모양 작은 순을 찾은 아침, 아비는 잠시 몸을 떨었다. 혹여, 참대 순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참대 밭에 쑥이 나도 참대같이 곧아진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참대 밭참대 난다.’ 그 말이 그 말이지…,

 

 

누운 참대 순을 바로 세웠다. 단단한 받침대도 세워 주었다. 받침대가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 척주(脊柱)가 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참대 순은 영영 일어설 줄 몰랐다. 자꾸 더 누웠다. 설설 잡풀 속을 기면서 내내 옆으로만 벋어나갔다. 아비를 거부하는 반역, 잡풀 속이 그리 좋았을까, 자존(自尊)을 유기(遺棄)한 자존(自存)이었을까,

 

                                                                                                     - 「천출」전문

 

 

  존재와 유관한 시간의 흔적으로 혈연만한 것이 있을까, “닳아도 닳아도 / 입묵(入墨) 자국, 살 속으로 파고들어 / 족보처럼 꿈틀거리는 저 실핏줄”(「디딤돌 4」). 존재의 가장 가까운 근원인 아버지. 시인에게 아버지는 수직 이미지와 밤, 죽음, 새 이미지를 거느린다. “대숲이 마른 겨울을 붙들고 있다 / 흘림체를 모르던 생전의 아버지”(「겨울대숲」).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의 아버지……에 이르러 “삼백 년생 돌배나무 안에서 십대조의 기침소리가 난다, 꼬장꼬장한 강설이 새어나온다”(「착시, 울안의 돌배나무 2」). 위 시에서 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수직성은 아버지가 살아온 꼿꼿한 삶과, 아버지가 시인에게 품었던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찌를 듯한 참대와 설설 기는 잡풀의 대비, “아비를 거부하는 반역”하는 ‘천출’ 아닌 아들이 어디 있기는 한가. 한편 죽음은 아버지의 수직성을 눕히면서 헝클어졌던 시간을 가지런하게 한다(「머리 빗는 날」)

.

 

회화나무 그늘에서 보았다, 그림자는 어둠이 아니라 목도장 자국인 것을, 머무르지 않는 빛이 땅에 찍어두는 도장, 오래된 도장에는 귀가 떨어져 나간 상처가 있고 회화나무 그늘에는 듬성듬성 얼룩이 있다, 상처 같은 얼룩들이 설렁설렁 옮겨 앉는다, 몸통 큰 그늘의 다리가 짧다, 그러나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있어 콩 콩 외발뛰기를 하는 그늘의 태생은 창세기이다,

 

 

어머니 품은 그늘져서 아늑했다, 젖내 배인 어머니의 가슴살은 아늘아늘 터서 얼룩졌다, 형에게서 내게로 옮겨온 그늘, 불안한 내 생을 버티어 준 그늘

 

 

옮겨가는 것은 그늘이 아니라 그늘의 흔적이다, 생전이든 사후든 어머니의 그늘은 늘 거기에 있었다, 회화나무 그늘처럼 그늘이 그늘이라고 명명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늘의 키가 작아졌다가 길어진다, 흐리거나 비오는 날엔 회화나무 그늘이 사라진다, 젖 뗄 때 가슴에 바른 어머니의 금계랍에선 젖내가 사라졌다, 사라져도 없어진 게 아니다,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늘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나이테가 없는 그늘의 단면, 아득한 졸음이 거기로 쏟아진다, 그렇게

                                                                             - 「그늘의 정체를 보았다 1」전문

 

 

  어머니 존재는 “그늘의 정체”와 동일하다. 그늘 이미지가 곧 어머니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늘은 아버지의 수직성과 상반되는 평면성(平面性)을 갖는다. 뾰죽한 선이 아니라 넓이를 갖는 면, 품이다. 위 시 1연에서 “그늘의 태생은 창세기”라고 말한다. 암흑과 혼돈의 장(場)에서 빛과 함께 생긴, 빛의 오누이. 따라서 그늘은 빛의 없음이 아니라 빛의 자국, 상처, 얼룩이다. 먼저 그늘은 “젖내 배인 어머니의 가슴살”이다. 품, 손길, 온기, 육필(「손편지」,「조약돌 사랑하기」)처럼 친밀한 이상의 껴안음, 생경한 ‘아늘아늘’의 용법에서(「나뭇가지 4」,「그늘의 정체를 보았다 1」,「청로샘」) 신성성, 리비도의 파동, 금지의 흔적들, 또 그늘은 실체를 떠받치는 지킴이다. 어머니는 “어둠을 누르는 지킴이”(「분꽃 일가」)면서 “집안을 떠받치는 똬리”(「똬리 2」)다. 무엇보다 그늘의 가장 큰 속성은 영원성이다. “어머니의 그늘은 늘 거기에 있었다”, “그늘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어머니는 존재의 시원을 열었던 탄생의 집이자 돌아가야 할 고향이기 때문이다. “생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은 되돌아가는 길이다”(「집 6」)

 

 

나는 마침내 한 이틀 배탈이 났다 할머니는 바가지에 샘물을 떠서 숯을 띄우고 식칼을 담근 채 방으로 들어왔다 나를 눕히고 뜨거운 이마에 비스듬히 열십자를 긋고는 그 칼 내 입에 물렸다 어금니와 아랫니 사이에 낀 칼날, 섬뜩하게 입술에 닿은 차가운 칼등으로 바가지의 물 두어 방울 흘려 넣었다 목젖 시린 그 물방울, 식도를 타고 내릴 때쯤 할머니는 대문을 향해 그 칼 냅다 던졌다 칼끝이 대문 밖을 향해 드러누우면 나는 곧 씻은 듯이 나았다 탈을 물린 것이다 

                                                                                                        - 「탈 6」부분

 

 

  시집의 3부 <가을 안개가 지나는 왜관 점경>은 고향 왜관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개인사와 가족사, 역사를 아우르는 고향은 아무리 퍼 올려도 고갈되지 않는 샘이다. 시인은 고향의 장소와 시간, 사람들을 호명하면서 존재의 뿌리를 확인한다. 수난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모래알을 씹는 듯한 이름, 왜관”(「가을 안개가 지나는 왜관 점경」)이지만 그곳에는 웃개, 아랫개, 갱빈, 여우골, 밤실, 숲데미산…… 이름만으로도 치유의 힘을 가진 땅이 있다. 구차하지만 “끈질긴 야생으로 끼리끼리 모여 오순도순 살아가는 개망초”(「개망초 9」) 닮은 사람들이 있다. 기억은, “궁해도 맑고 신나는 날”(「청로샘」)을 무한 재생하면서 신생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탈 6」은 동짓날 팥죽으로 인해 탈이 난 시인을 신비한 방법으로 낫게 하는 장면이다. 제의를 방불케 하는 할머니의 몸짓이 범접할 수 없이 엄숙하다. 칼날을 타고 내리는 물은 그저 바가지 속의 물이 아니다. ‘어머니들’의 비원이 하늘에 응결해 내리는, 생명력을 가진 물이다. 동짓날 칼날을 타고 들어오는 두어 방울(!)의 물은 얼마나 찼을까. 목에 닿았던 이 물방울의 감각과 칼을 던지는 할머니의 몸 사위, 그리고 “가슴에 감쳐져 사라지지 않는”(「가슴에 감치는 모습」) 그리움으로 시인의 말집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