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4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2013]

김주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해설 - 존재의 집을 거듭 지어서 거듭 허무는 자(이승하)

김주완 2013. 8. 23. 15:45

 

[김주완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해설]

 

[월간 한국시, 2013. 10월호(통권 294호), 2013.10.01. 159~171쪽, <현대시인론 263> 전재]

 

 

존재의 집을 거듭 지어서 거듭 허무는 자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왜 우리 조상은 시를 잘 쓰는 사람을 관리로 등용했을까? 과거제도는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인데, 고려 광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구한말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무려 1,000년을 지속한 과거제도의 핵심은 문과에서는 제술업과 명경업이었다. 제술업은 시(詩), 부(賦), 송(頌), 책(策)을 잘 짓는 것이었고, 명경업은 유교 경전을 잘 외우고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시와 산문을 잘 쓰면 과거급제를 할 수 있었고, 시 짓는 재주가 없으면 과거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었다. 예전의 고을 관리는 동장이면서 경찰서장과 세무서장을 겸하였다. 판사도 겸하였다. 시를 잘 쓰면 이런 능력을 고루 갖추게 되더라는 것이 우리 조상의 생각이었다. 즉, 시 짓는 능력 속에는 세상을 보는 통찰력, 인생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아는 혜안, 지식의 축적, 지식의 현실 적용, 죄의 경중을 재는 능력 등 거의 모든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고, 이는 잘못된 생각이 아니었다. 이 생각에 문제가 있었더라면 경전의 자구 해석을 놓고 밤낮없이 논쟁하는 사대부 양반들이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추천제로 바꿨거나 경전 암기력 같은 것을 테스트했을 것이다.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란 말을 공자가 한 이래 이 말은 동양권 전체에서 불변의 진리로 인식되었다. 동서양 공히 시의 역사가 3,000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 것은 시가 갖고 있는 기막힌 ‘생명력’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언어도단이나 불립문자는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언어 부정의 경지를 추구하지만 시는 언어로써 언어를 초월한다. 언어가 없이는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이 불가능하지만 시적 언어는 그런 사전적 의미 차원이 아니다. 다의성과 애매성을 지닌 시적 언어는 그 뜻을 무궁무진 펼칠 수 있다. 한 편 시에 우주가 담긴다는 것은 그래서 나온 이야기다. ‘시적 표현’이란 것은 참으로 오묘하여 때로는 직설적이고 때로는 함축적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세계를 다 아우르고, 관념과 실체를 포괄하며, 상상력과 체험의 멋진 하모니를 연출하는 시라는 것!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전편 해설을 시도한 이가 송욱, 윤재근, 김재홍, 김광원 등이었는데 최근에 정효구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를 펴냈다. 시는 마치 우물 같다.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오는 우물 같은 것이 시다.

 

김주완 시인은 구상 시인의 추천으로 198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뒤 3권의 시집을 냈고 이번에 제4시집을 준비 중이다. 30년 동안의 3권 시집이라……. 철학박사를 받고 대학교수로서 학생들 가르치느라 시 쓰기에 전력투구하기가 어려웠던 듯하다. 퇴임 후 비로소 시를 본격적으로 쓰고 있는 김 시인은 아마도 시의 묘미를 뒤늦게 알게 되었기에 시를 쓰고 또 시작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1부의 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뭇 발들이 오가고

바람과 구름도 드나들었다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손에 들려서 지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순한 신발도 흔적을 남기면서

갔다

 

닳아도 닳아도

입묵(入墨) 자국, 살 속으로 파고들어

족보처럼 꿈틀거리는 저 실핏줄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디딤돌 4」 전문

 

 

시인의 연세를 헤아려본다. 65세, 대학에서도 막 퇴임을 했다고 한다. 사람은 젊었을 때는 위만 보고 오르려 한다. 승진, 출세, 집 장만, 자식 교육……. 인생행로에는 오르는 길만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길은 내리막길이 되어 있다.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손에 들려서 지나갔다”고 하니, 노년기에는 장례식장 방문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제4연, 몸에 문신 새기는 일로 이어진다. 어느 누군가의 몸에 “족보처럼 꿈틀거리는 저 실핏줄”이 새겨진다. 하지만 인생은 삼천갑자 동방삭처럼 구르고 구르는 것이요 빌딩 회전문처럼 돌고 도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생로병사는 남의 일이 아닌데, 우리는 나 자신의 노환과 병고와 죽음이 너무 먼 곳의 일인 양 소홀히 생각하며 살아가다 봉변을 당한다.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임을 우리 모두 가슴에 새긴다면 나날을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지는 않으리라.

 

 

뾰족이 내민 돌부리는

사방을 향해 적의를 내뿜고 있다

누구든 와서 그에게 걸리면

살기 띤 눈을 치뜨고

순식간에 상대방을 쓰러뜨린다

얼굴이나 팔꿈치 혹은 무르팍

어디든 가리지 않고 생채기를 낸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일순에 무너지는 황당한 몰락,

그러나 돌부리는 멀쩡하다

놈의 뿌리가

굳건하게 땅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돌부리를 지켜주는

돌의 뿌리

                                  ―「돌부리」 전문

 

 

일종의 사물시이다. 길에 튀어나와 있는 돌부리는 행인을 넘어지게 하고 다치게도 하는 몹쓸 존재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을 “길을 가다가 갑자기/일순에 무너지는 황당한 몰락”으로 묘사한 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돌부리는 멀쩡하다”. 왜? “놈의 뿌리가/굳건하게 땅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돌부리 하나를 보고 배운 것이 있다. 자신의 자존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심지가 굳은 사람은 부화뇌동하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고꾸라지고 크게 다치는 동안에도 돌부리는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시인이 나름의 연륜으로 인생철학을 은유적으로 논한 시가 주로 제1부를 점하고 있다. 잠자리 최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법열에 떠는 성스러운 짝짓기 의식이 끝나고 나면 암컷은 충만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생식물이나 물속에 알을 낳는다 쏟아내듯 줄줄 알을 낳는다 그리고는 금방 죽고 만다 할 일을 다한 생(生)의 장렬한 종지부, 영원한 잠자리에 드는 잠자리, 온 데로 돌아간다

                                                                      ―「잠자리 3」 마지막 연

 

 

잠자리는 종족 번식을 위한 성스러운 짝짓기 의식을 끝내고는 알을 놓고 금방 죽는데 우리 인간은 어떤가. 자신의 몸을 보하겠다고 온갖 야생동물을 덫이나 올무로 잡아서 먹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의학의 발달은 인간한테서 자연사할 기회를 빼앗아가고, 갖가지 무리한 처방으로 목숨만 간신히 연명하게 한다. 안락사는 법적으로 안 되므로 수많은 인간이 산소호흡기와 여러 개의 줄을 몸에 붙이고서 연명만 하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사할 권리를 줘야 하는데 안락사는 또 어찌 보면 살인이므로 허용되지 않고 있다. 어느 날 시인 김주완, 자신의 임종과 그 이후를 생각해본다.

 

 

그래도,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죽은 채로 죽지도 못하고 무망하게 살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싶어

누가 나를 갈부수어 가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흔적 없이 하얗게 망각되고 싶다

                                 ―「압화(押花)」 마지막 연

 

 

우리 모두 반드시 맞이하게 될 최후의 순간, 그 순간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시인은 상상해본다, “나의 질식을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살아온 날들의 부피가 허공으로 빠져나가”고, “사지 멀쩡하던 굴곡진 몸체가 허망하게 무너”진다고. 잠자리는 생로병사 기간이 아주 짧지만 우리 인간은 이제 100년을 바라보고 있다. 아래의 시는 반드시 꽃과 열매만의 거리를 논한 것일까?

 

 

없는 완성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슬프다

 

꽃피우지 말아야 한다

어쩌지 못해 꽃을 피웠거든

열매 맺지 말아야 한다

이래저래 열매 맺었더라도

완숙으로 가지는 말아야 한다

 

거리(距離)를 벗어나면 외톨이가 되는데

외로워야,

너는 너로 남는다

                     ―「꽃과 열매의 거리 5」 후반부

 

 

세상의 거의 모든 열매가 둥글다.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꽃은 피우더라도 열매는 맺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 시인은 “이래저래 열매 맺었더라도/완숙으로 가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열렬히 사랑하다 맞이하는 이별은 더 서러운 것처럼 차라리 그 사랑조차 행해지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보다는 미완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외로워해야만 너는 너로 남고 나는 나로 남기 때문이다. 단독자로서 자기인식이 필요함을 역설한 이 시는 현대인의 고독에 대해 논한 시이기도 하다.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지도 모른다. 멧돼지야 제 본능대로 노는 것이겠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망치 같은 멧돼지 주둥이가 아버지 산소를 파 뭉개고 있는지 모른다/놈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선잠 3」)는 것이다. 땅강아지가 땅으로 기면 제 목숨을 잘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불빛을 보고 날아가다(아, 날개가 없었더라면!) 떨어져 “버둥거리다 생을 마감하는 수도 있다”(「땅으로 기다 1」).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인가.

 

제2부는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기록부 같은 시편이다. 자연의 변화를 보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 일종의 전원시나 목가풍의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법에서 인간세상의 모습을 그리거나 모순을 파악해내고 있다.

 

 

개의 혀가 붉은 능소화처럼 늘어졌어

숨을 헐떡이는 소의 눈동자가 풀어졌어

해가 지지 않는 오늘 같은 날은 싫어

도대체 밤이 오긴 오는 거야

설레는 한 주를 보내도 푸른 행운은 번번이 빗나가고

이제 기다리는데 이력이 났어

설레지도 않아

그럼, 내게 왔을 때만 너는 내 여자야

문을 나서고, 꽃잎처럼 날려 가는

지구 끝에서 온

너를 붙들고 있으면 안 되지

새는 날아야 새가 되는 거야

정말, 왜 이리 긴 거야 오늘은

옛날

싫은 과목의 끝나지 않는 수업시간 같아

                                           ―「하지 1」 전문

 

 

연중 낮이 제일 긴 하지 하루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니, 참으로 신선한 느낌을 준다. 제목이 ‘하지’가 아니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시이다. 상상력의 진폭이 매우 커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한다. 즉, 이런 시는 독자의 이해력과 분석력, 추리력을 요하고 있다. 「우산 1」 「맨드라미」 「갤러리에 갇힌 풍경」 「파지」 「아궁이」 「불길」 등 흥미롭게 읽은 시 가운데 비교적 짧은 시를 한 편 보자.

 

 

어탁을 뜨듯 마음의 윤곽을 받아쓰기만 했다

보태거나 뺀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찢어져, 끝내 버려졌다

 

부서진 내 몸속, 파편으로 남은 그녀의 한때가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라 그녀 잘못이다

                                     ―「파지」 전반부

 

 

화자가 파지(破紙)가 되었다. 이 시에서 그녀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시 전체의 의미 파악도 쉽지 않은데, 일단 ‘무너진 사랑탑’쯤으로 이해를 해본다. 그녀는 나를 버린 매정한 여인인가? 나로 하여금 자꾸 파지를 내게 하는 잊지 못할 여인인가? 시와 음악의 여신 뮤즈인가?

 

 

자기가 자기 맘에 들지 않았던 그녀의

먹점

그녀가 버린 어제인, 내가

바람벽의 철지난 광고지처럼 휴지통에서 탈색하고 있다

떨어져 썩어가는 꽃잎 같다

 

꽃이고 싶어 꽃으로 피는 꽃이 있겠는가

낙화이고 싶어 낙화인 꽃이 있겠는가

                                                      ―「파지」 후반부

 

 

버림받은 화자의 처지가 휴지통에서 탈색되고 있는 바람벽의 철지난 광고지 같다고 한다. 어느 종이인들 파지가 될 꿈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인들 버림받은 신세가 되고 싶어 연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꽃이든 “낙화이고 싶어 낙화한 꽃이 있겠는가”.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몇 장의 파지를 내는 시인의 고뇌에 동참하고 싶다. “샐비어 꽃처럼/타오를 수 있을 때 타올라라/살아 있으니까 불타는 것이다”(「불길」)라며 생명체의 생명력과 생명현상에 대해 연구를 거듭한다.

 

시인은 제3부에 가서 고향 왜관의 과거를 연구하고 현재를 탐색한다. 지명이 왜 ‘倭館’인가를 생각해보라. 왜관은 6·25 때 ‘왜관전투’로도 유명하다.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도시인 것이다. 시인은 왜관 구장터에 있던 청로샘 주변의 광경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기지촌 여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왜관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구왜관이 있던 백포산성터는 강 건너에 있고 이쪽에 있는 소읍 왜관의 시가지도 저 아랫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곳이라 하여 ‘관터’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 벽진 이씨, 광주 이씨 양반네 선조들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왜인들을 보며 망연했을까, 왜인들이 물러가자 뒤이어 미군들이 널널이 들어오고 기지촌이 자리 잡을 때 그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돌밭 가는 길 3」 제2연

 

 

한 편 시 속에 왜관의 100년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전개된다. 지나치게 산문적으로 쓴 것이 흠이긴 하지만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미군정기, 6·25와 전후시대가 한 편 시 속에 펼쳐진다. 왜관의 옛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다음과 같이 이뤄지기도 한다.

 

 

격전지 자고산과 구철교는 잠시 추안거(秋安居)에 들어간다

웃개와 아랫개, 갱빈에서는

맨발로 나선 사람들이, 사라진 과수원 길로

흘러내린 날들을 버려둔 채 달려가고 있을까

자갈이 뒹구는 비포장도로 위로

덜컹덜컹 끌려오는 소달구지 소리가 들린다

구장터쯤에서 날아오른 장꾼들의 우렁우렁 말소리가

안개 속으로 녹아내린다.

                              ―「가을 안개가 지나는 왜관 점경」 중반부

 

 

흡사 옛날 필름을 보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원로도 없는 세상, 시인은 이런 식으로 시로써나마 왜관의 옛 광경을 복원하여 보여준다.

제2부의 뒤편 시는 시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은 「손의 비밀 2」 「신발 3」 「똬리 2」 「탈 6」 「갈피끈」 「가을밤에 찍는 느낌표 3」 등 한두 편이 아니다. 집안의 내력은 「아카시아꽃 1」 「착시, 울안의 돌배나무 2」 「분꽃 일가」 등이다. 이야기시의 특징을 잘 살려, 집안의 내력과 가족사적 이력이 소상히 펼쳐지는 시편인데 쉽게 이해가 되므로 따로 해설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4부에는 시인이 생애 내내 팠던 학문이 ‘철학’이었던 것이 반영되어 상당히 철학적인 시가 많다. 안 좋게 말하면 관념적이고 좋게 말하면 형이상학적인데,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거의 우물 파기의 수준이다. 「빨래를 삶으며」 같은 시의 제목만 보면 일상적 차원의 시 같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주 긴 시가 많고, 어떤 철학적 명제에 대한 시인의 사고가 깊고도 길다. 꽤 난해한 시도 보인다. 아마도 철학으로 설명해야 할 것을 시로 풀어낸 탓이리라, 이해한다.

 

 

시작이 내 것이 아니었기에

끝도 내가 내는 것은 아니랍니다

먼 길은 끝나지 않는 겨울 속으로만 나 있다지요

―「겨울 원행」 마지막 연

 

빛깔과 빛깔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 홀로 돌아앉은

적요의 빛깔은 버려진 자의 탈색, 혹은 텅 빈 무색이다

시간이 정지한 지대에서 말없이 바라보는 허공의 빛깔

                                                    ―「적요의 빛깔 1」 마지막 연

 

 

일상의 차원이 아니라 관념의 차원이어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떤 시는 지나치게 길고 어떤 시는 내포가 무진장 깊다. 제4부의 시는 거의 다가 철학서의 한 장(章)이 한 편씩의 시가 되었다.

 

 

말 속에는 존재가 들어 있다 말의 집에는 존재가 거주하고 있다 소라게처럼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간 것이 아니다 누가 그에게 이름 붙여주었을 때, 너를 너라고 소리 내어 불러주었을 때 주술에 걸린 것처럼 존재는 말 속으로 빨려 들어가 거기에 거처를 정할 뿐이다 그때부터 말은 감옥이 된다

                                                                           ―「집 14-존재의 집」 제3연

 

 

시를 가리켜 ‘존재의 집’이라고 한 이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였다. 김주완 시인은 65세 나이에 무당이 대나무를 붙잡고 있듯이 시를 붙잡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철학으로 사고했겠지만 지금은 시로써 생로병사의 진의와 희로애락의 실체가 무엇인지 풀어나가려고 한다. 자신의 시론을 가장 명징하게 전개해본 시가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말로써 존재의 집을 만들어보려는 자, 바로 김주완 시인이다.

 

시인은 과거 한때 ‘말의 감옥’에 갇혀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던가 보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큼 지나면 집은 또 헌집이 되고 집 속의 존재 또한 헌것이 된다 나는 이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말집이 없어 갇히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자유다 낡을 일이 없다 내가 없는 채로 나는 이대로 가는 거다”라며 시에 대한 각오가 예사롭지 않음을 이런 식으로 피력하고 있다. 존재의 집에 안주하지 않고 완공된 집을 허물고 또 짓고, 또 허무는 자유인의 방황과 방랑이 시인의 앞날이 될 것이다.

 

해설자는 김주완 시인이 우리 시단에서는 드물게, 연륜만으로 한몫 보려는 시인이 아니라 ?삼국지?의 황충처럼 ‘노익장’의 시를 쓸 것을 믿는다. 우리 시단은 요절한 천재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첫 시집에 최고점을 주는 나쁜 관행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젊은 시를 쓰는 시인이 한 분 왜관에 계시다. 그분의 성함이 ‘김주완’ 시인이다. 생을 완주하고자 하는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이 이름을 기억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