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4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2013]

[시] 분꽃 일가 / 김주완 [2013.03.26.]

김주완 2013. 3. 28. 14:01

 

[시]


분꽃 일가 / 김주완


묵은 청태 낀 돌담을 돌아가면 울안이 있지

울안엔 붉고 흰 살을 붙인 일가붙이들이 살고 있어

마당가의 그들은

느지막이 핀 꽃이 아침까지 가는 것을 알았어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밥을 해먹고

허리가 긴 대숲 사이

달이 뜨면 수줍은 얼굴들에 생기가 돌았지

마당에는 모깃불 생쑥향 울컥울컥 솟아오르고

적삼에서 젖내 풍기며

마실 온 아랫집 아낙의 걸쭉한 입담에 거품 일면

감나무 두터운 그늘 아래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지

밤 구렁이는 무섭지 않아, 어둠을 누르는 지킴이거든

긴 담뱃대 물고 앉은 할머니 같아

날 받아놓은 누나는 여울 같은 가슴이 회돌이 쳤을 거야

검게 여문 씨앗 하나 빈손으로 또르르 떨궈 보내는

어머니의 숨결에선 때 아닌 겨울바람이 일었겠지

한 가지에 피어 문득 먼저 진 분꽃, 노랑과 분홍 꽃잎들은 물결부전나비가 되었을까

도회로 나가 소식 끊긴 작은 아들은 변두리 인력시장을 배회하고 있는지

먼 길 오다 보면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법이지

분꽃 여리고 긴 줄기

지나온 고비들이 숨차 중간 중간 관절이 굵어진 거야

그래도 돌담 묵은 뼈대의

울안이라 그럭저럭 대를 이어가는 거지

수챗가에서도 참 용하게 살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