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빨래를 삶으며 / 김주완
볕 좋은 날 후드를 열고 빨래를 삶으면
바람 찬 플레어치마처럼 뭉게구름은 부풀어 오르지
삶으면 살아나는 생, 풀어지며 스러지는 어제의 묵은 때
풍로의 좁은 주둥이로 쉬엄쉬엄 부채질하면 무희처럼 발갛게 춤추던 숯불꽃
펄럭이는 몸 위에서 폭폭 탕약을 달이듯
약한 불에서 남편의 속옷을 삶다 보면 뽀글뽀글
비누거품 속으로 뽀얗게 일어서는 어느 날의 생기
방울토마토처럼 팽팽했지, 언제나 반짝였지
옥상으로 다 빠져나가지 못한 김이 달무리로 부딪치는
통유리 창문엔 음각된 밤이 판화처럼 떠오르지
수묵처럼 번지는 야생의 얼룩은 아름다워, 젖어서 부드러워
초원 끝에 있는 용암온천의 풍경은 우윳빛이었지
한 손 가득 거머쥔
방울방울 물풍선 너머로 무지개가 서렸었지
새털구름을 분쇄한 가루비누 분말에선 여린 새소리가 났어
남편을 점령한
떨어지지 않는 점성을 씻어내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어
겨울 너머에서 봄이 오고 마음에 먼저 기포가 생겨나지
냉이 싹이 돋는 강둑에서 한 입 가득 침이 돌거야
토마토 밭에는 눈이 매운 향기가 흐르고 있었지
찰랑찰랑 가슴에 달고 처음 교문을 들어서던 가제 손수건
빨간 색실로 수놓은 패랭이꽃이 팔랑거리는 시간 또는
목덜미가 파란 단발머리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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