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바람의 길 4 / 김주완
지리산 성삼재에서 떠오른 행글라이더가 활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날렵하고 경쾌한 바람의 손길이 붉고 푸른 나비들을 부드럽게 받아 내렸다 노고단에 앉은 늙은 할미가 구레 쪽을 내려다보며 손사래를 치자 산허리에 걸린 구름자락이 슬며시 허리띠를 풀어 내렸다
센 바람은 막힌 것을 밀면서 달리고 여린 바람은 열린 곳을 찾아서 흐른다 바람이 달빛을 밀어내는 밤, 정처 없이 모래사장 끝으로 나앉던 달빛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모든 길이 열리게 된다
원형 그대로의 바람이 내는 길
가면 길이 되고 서면 거소가 되는
무량한 바람의 자유
심심하면 지상으로 내려오는 천상의 바람을 받아안는 새의 꽁지에는 민감한 탐지기가 부착되어 있다 바람의 강도와 방향을 재는 깃의 떨림에 따라 나뭇가지에 앉아 가볍게 몸을 털며 깃털을 말리거나 바람의 길 밖으로 후드득 도망치듯 날아간다
바람의 혀가 풀숲을 핥으며 지나간다, 풀숲은 가지런히 허리를 젖혔다가 일어난다 바람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사라지는 바람의 길, 위로 흐르는 바람소리, 솔바람소리
바람은 굳이 길을 내지 않는다
쓰다듬듯 지나간 모든 곳이 길이 된다
숲의 위로도, 나뭇가지 사이로도 유연하게 빠져나간다
황소나 자동차를 싸안고 나선형으로 감아올리는 회오리바람
바람의 길은 공중에서 만드는 아이스크림과 흡사하다
베란다 방충망을 치고 들어오는 바람을 보면 부챗살처럼 갈라진 바람의 길들이 어느새 어물어물 섞이는 것을 알게 된다
섞이고 뭉치고 흩어지며 질주하는
바람의 눈, 바람의
손, 바람의
이마, 바람의
발에는 커다란 갈퀴가 달려 있다
마음대로 세웠다가 눕히는 고양이 발톱 같은 갈퀴
잠자는 바람은 길 위에서 취하는 잠시의 휴식이다
길을 가기 위한 길 위의 길, 바람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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