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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의 문화칼럼 10] 새순과 죽은 가지[칠곡신문 : 2009.04.29]/ 김주완

김주완 2009. 4. 29. 16:42

<김주완의 문화칼럼>새순과 죽은 가지

2009년 04월 29일(수) 15:47 [칠곡신문]

 

갇힌 것은 썩지만 소통하는 것은 싱싱하다


 

↑↑ 김주완
-1949년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순심중(17회)
-대구고등(8회)/경북대학교(20회)
-계명대학교 대학원 졸업
교육학 석사/철학박사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역임
대학원장/교육대학원장/국학대학장
교무처장/기획처장/행정처장/홍보실장 역임
-대한철학회장/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역임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

 

새봄엔 새순이 돋아난다. 마른 가지를 뚫고 앙증맞은 얼굴을 내민다. 아기의 연한 손처럼 쏙 내미는 연록빛 새잎을 보면 절로 가슴이 찌릿해진다. 그 빛깔, 생명의 처음 빛깔인 연록빛은 맑고 깨끗하고 깜찍하다. 병아리나 새끼 새의 재잘거림 같은 소리들이 자욱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마음이 돌처럼 무디어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 빛깔에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새 생명의 신비에 경건해지는 심성의 반응이다.

머지않아 새순은 진녹색으로 싱싱하게 자라날 것이다. 물과 햇빛을 빨아들이며 잎을 살찌워 마침내 푸른 숲으로 우거질 것이다. 울울창창한 숲은 풍요를 구가하면서 강과 산을 끌어안을 것이다. 여름의 작열하는 하늘 아래서 머루와 다래, 도라지와 더덕까지 살 깊은 자양분으로 키워낼 것이다. 바야흐로 새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소외되거나 핍박 받는 자 없이 가을의 수확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자연은 아무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숲에는 겨울 지나며 죽은 가지들도 있다. 제법 굵은 가지도 꺼멓게 죽은 채로 지난해의 묵은 잎만 오그라진 채로 대롱대롱 달고 있다. 떨어지지 않겠다는 그 집념들이 대단하다. 죽은 가지와 죽은 잎들은 어쩌면 운명공동체이다. 가지는 잎을 붙들고 부지하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잎은 가지에 기대어 조금이라도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애를 쓴다. 어쩌면 자기보존의 몸부림이고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다.

지난 겨울의 광풍도 버티어 내었는데 이까짓 봄바람쯤이야 하면서 떨리는 몸의 중심을 잡는다. 그들은 오랫동안 누려온 영광과 호사를 떠올리면서 올 한해도 그런 날들로 보내고 싶어 한다. 그들의 이러한 소망은 간절하다 못해 처절하다. 살아남기 위한 술수를 부리고 권위의 성벽을 높여보기도 한다. 재생에 대한 비장한 각오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 위에서 그들은 마침내 떨어지고 부러질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몸도 정신도 이미 고사했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살아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는 것만이 그들에게 남은 일이다. 여름이 오기 전에 그들은 떨어질 것이다. 살아있는 나무에서 이탈하여 비탈길로 굴러갈 것이다. 자연의 순리가 그러하다.

잎과 가지, 나무와 숲을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치가 보인다. 묵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등장한다.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묵은 것이 계속해서 행세할 수는 없다. 새로 나타난 새것은 새로운 소임을 띄고 그에게 주어진 역할에 매진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새것은 신선하고 참신하며 역동적이다. 세상이 끝나지 않고 이어져 나가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에도 새것이 있고 진보에도 묵은 것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흐름의 문제이다. 막히고 갇힌 것은 부패하지만 열려서 소통하는 것은 싱싱하게 성장한다. 흐름 위에서는 누구나 일정한 구간만 승차할 수 있는 승객에 불과하다.

칠곡신문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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