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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의 문화칼럼 9] 강둑길을 걸으며[칠곡신문 : 2009.03.31.] / 김주완

김주완 2009. 3. 31. 16:46

김주완의 문화칼럼-강둑길을 걸으며

2009년 03월 31일(화) 18:01 [칠곡신문]

 

江山으로 축복받은 젊은 왜관


 

↑↑ 김주완

1949년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순심중(17회) 졸업
대구고등(8회)/경북대학교(20회)/계명대학교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시인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역임
대구한의대 대학원장/교육대학원장/국학대학장/교무처장/기획처장/행정처장/홍보실장 역임
대한철학회장/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역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강사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풍요하다. 젖줄 같은 물을 찾아 자리 잡은 천혜의 요람이다. 파리의 센강이나 런던의 템스강, 서울의 한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강변으로 둑길이라도 만들어져 있는 도시는 낭만과 운치가 있다. 왜관 낙동강의 십리 강둑길이 그러하다.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흔이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는 왜관철교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낙동강을 따라 제2왜관교에 이르는 강둑길은 왕복으로 십리에 달한다. 그리 긴 거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산책로로서는 딱 알맞은 거리이다. 철철이 그것도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대에 따라 강둑길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그 강으로 봄이 오고 여름이 열리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머물다 비켜나는 생(生)의 순환이 되풀이된다.

강둑길을 걸으며 강을 바라본다.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본다. 강은 막힘이 없고 거침이 없다. 막아서는 것이 있으면 무너뜨리고 간다. 무너뜨릴 수 없으면 감싸 안으면서 돌아서 간다. 도리(道理)이며 순리(順理)이다. 강은 무리하지 않는다. 수량이 많아지면 부풀어 오르고 적어지면 엎드려 몸을 낮춘다. 갈수기의 강은 벗은 몸이 수줍어 강바닥으로 숨어든다. 메마른 몸으로 기어가면서도 지상의 그림자는 제자리에 남겨두고 간다. 굳이 욕심내지 않고 고집 부리지 않는다. 강은 머물려고 소망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다. 강은 그에게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페놀과 1.4-다이옥산도 받아들인다. 그의 몸이 중병을 앓으면서도 강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화되고 소생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강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복이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이고 살아가는 인내와 헌신의 지복(至福)이 곧 강이다.

공자는 일찍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밝아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시인 구상 선생은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는다(觀水洗心)”고 했다. 한때의 탐욕이 실로 부질없음을 깨치고 사리에 따라 씻어내는 지혜를 강에서 배워야 한다. 흐름으로써 늙지 않는 강의 건강성을 배워야 한다. 건강은 변화이며 생동이다. 노욕(老慾)이 없는 강의 순박함으로 강은 천년만년 청년인 것이다.

왜관의 강둑길을 걸으면 어느새 온몸으로 생기가 돈다. 유학산에서 솟아올라 생동하는 지기(地氣)가 자고산 능선을 타고 내리다가 강에 와서 부딪쳐 마침내 머문다. 강둑길을 걸으며 그 생기를 받다보면 저절로 온몸에 활기가 넘쳐난다. 젊음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왜관 사람들은 풋풋하다. 사람마다 싱그러운 생의 향기, 강의 향내가 난다. 강을 끼고 있는 왜관과 왜관사람은 그러므로 영원히 늙지 않는다. 강과 산으로 축복받은 곳, 왜관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늘 청청하다.

칠곡신문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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