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낙강문학> 재2호, 낙동강문학관, 2023.4.1., 56~88쪽에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 중 일부 오류와 오자를 바로 잡은 것이 이 글이다.
하기락과 시인들의 교분
철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하기락은 시인들과의 교분도 각별하였다. 철학과 문학의 소통이나 융합이라기보다는 아나키즘적 자유 지향과 시적 자유 지향의 연결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아니면 해방과 전쟁이라는 민족사적 격동기와 분단과 독재라는 후진적 정치 현실 속에서 살아야 했던 당대 지성들의 외로운 교분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청마 유치환과 하기락
유치환(1908~1967)은 하기락(1912~1997)보다 4년 연상이다. 출생지나 성장지, 출신학교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맺은 지교는 군데군데 남아 있다. 그 공분모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 아나키즘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유치환은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문과 1년을 중퇴하고 2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고 한다. 3
하기락은 1929년 경성제2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 2년 재학 중 광주학생사건에 선봉으로 가담하여 무기정학을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아나키스트 입장에 섰다 4 고 자술하고 있다. 이후 1931년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학하여 1933년 졸업할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다지며 당시 마포에 거주하던 아나키스트 이정규선생의 지도 아래 일본 아나키스트 기관지 5《흑기(黑旗》를 학생서클에 보급하면서 아나키즘을 선전하였다. 6
이로 미루어 보면 유치환과 하기락의 활동 공간과 이념 공간이 일치하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 초에 두 사람의 조우는 서울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인 박노석은 20대 청년시절부터 유치환과 친교가 있었다 7고 하는데 하기락과 박노석은 동향 친구로서 함께 아나키스트 운동을 한 사람임을 감안하면 하기락이 서울에서 알게 된 유치환을 고향의 박노석에게 소개시켜 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하기락과 유치환의 교분 흔적은 1952년에 발견된다.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인 하기락은 1952년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안의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에 취임한다. 그해 11월 통영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유치환은 안의중학교 교사로 옮겨온다. 8[/footnote] 재단이사장인 하기락이 같은 재단의 중학교로 유치환을 초빙한 것으로 보인다. 유치환은 이어서 곧 안의중학교 교장을 맡는다. “청마(유치환)가 나(박노석)와 허유(하기락)의 간청을 받아 내 고장 안의중학 교장으로 재직” 9하게 되었다고 박노석은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청마문학관에 있는 유치환 연보에 따르면 1954년 10월 유치환은 안의중학교장 직책을 사임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53년부터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주임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던 하기락은 1955년에서 1958년 사이의 어느 해에 유치환을 경북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초빙한 적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유치환 연보에는 1959년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만 나와 있는데 취임 일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 이전의 경력도 나타나 있지 않다.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유치환은 경북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한 경력이 있다. 그것은 하기락의 구전에서 입증된다. 1987년에서 1990년 사이의 어느 날 대구 동인호텔 근처에서 하기락, 구상(1919~2004), 이윤수(1914~1997), 김주완(1949~ )이 주석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얘기들이 편하게 오고 갔는데 이 자리에서 하기락이 “청마를 경북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불렀는데 한 학기 강의를 하고 나더니 ‘이거는 못하겠다’고 하면서 그만 두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가더라”고 하였고 좌중이 모두 웃었다. 유치환이 대학 강의를 그만 두고 교장으로 나간 바로 그 학교가 경주고등학교인 것으로 보인다.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 후 1년 7개월 후 유치환은 1961년 5월에 경주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다시 10개월 후인 1962년 3월에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 1963년 7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 취임, 1965년 4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것으로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학교별 재직 기간이 짧으면 6개월 길면 2년여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을 싫어하는 유치환의 성품이 참으로 자유분방하고 호방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남들은 좋은 자리라고 하는 대학교수나 학교장 자리를 진득하게 보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성품은 일체의 권위나 속박,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의 자유정신과도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 제1세대 철학자로서 학문의 길과 아나키스트로서 실천의 길을 병행해서 한 생을 살아온 하기락은 그의 만년인 1988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세계평화국제회의>를 개최한다. 마침 제24회 서울올림픽(88 서울올림픽) 개최 기간(1988.09.17.(토) ~ 10.02.(일)) 직후의 시기에 열린 이 행사에는 17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였다. 국제아나키스트연맹, 프랑스아나키스트연맹, 한국ㆍ호주ㆍ영국ㆍ캐나다ㆍ서독ㆍ가이아나ㆍ홍콩ㆍ이탈리아ㆍ일본ㆍ폴란드ㆍ스페인ㆍ미국ㆍ소련 등의 아나키스트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대회의 프로시딩 맨 앞부분에는 헌사 10가 실려 있다. 독립운동과 사회변혁에 앞장서서 헌신하다 옥사하거나 작고한 아나키스트 328명 11을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하는데 이름 뒤의 괄호 속에는 단체나 사건의 명칭과 해당 년도를 표시하였다. 신채호, 박열,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유림, 양일동 등 328명을 호명한 뒤, <상기 선열동지들의 영전에 삼가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하고 있다. 바로 이 가운데 유치환의 4형제 중 유치진, 유치환, 유치상 3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름을 올리고 있다. 12그만큼 유치환 가문은 아나키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문단 한쪽에서는 유치환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지면에 발표된 글 속의 한 두 문장으로 친일파라고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걸어온 전 생애에 걸친 이념 지향이 무엇인가를 보다 큰 시각에서 살피는 것이 옳을 것이며, 발표된 글의 한 두 문장에 만약 친일 혐의가 있다면 그것 또한 전체적 맥락에서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경위는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필자의 표현 그대로인지 아니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오염된 것인지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표현으로 필자가 과연 무슨 이득을 취했는가 하는 것까지 살핀 후 친일 여부를 최종적으로 단정 짓는 것이 옳으리라고 생각한다.
□ 파성 설창수와 하기락
하기락(1912~1997)과 파성 설창수(1916~1998)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 10대 후반이었던 1931년 겨울쯤으로 짐작된다. 설창수는 하기락의 동생 하충현(河忠鉉)의 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하기락은 중앙고보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진주농업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동생 하충현이 비밀결사 T.K.단 사건 13의 주모자로 발각되어 퇴학을 당하고 서울로 올라온다.하충현은 경신학교에 편입학하여 형인 하기락과 함께 하숙을 하다가 진주서의 형사들에게 검거되어 진주로 압송되었으며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해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하기락은 진주로 내려가 동생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14이때 하충현과 설창수가 같이 구속되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하기락과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4년의 연령 차이가 나는 하기락과 설창수는 이후 친구로 지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의 만남은 하기락의 친구이며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인 박노석의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1982년 11월에 하기락, 설창수, 박노석이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청유한 기록이 있다. 15
하기락의 유품이 경북대학교 철학과에 보관되어 오다가 2022년 11월 5일 낙동강문학관(관장 박찬선)에 기탁되면서 하기락의 배낭 속에서 설창수의 육필 시 원고 <생명 존중>이 발견되었다. 하기락이 발행하던 국제평화협회의 기관지 《평협(平協)》에 게재하기 위하여 청탁했던 원고로 보이며 연작으로 쓰인 시의 제목이 <생명 존중>이며 제재가 대리모 문제인 것으로 보아 당시 사회적 논쟁이 비등했던 생명윤리를 다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설창수가 하기락에게 이 원고를 넣어서 보낸 등기우편 봉투에는 1997년 1월 3일 소인이 찍혀 있었다. 이후 하기락은 한 달 뒤인 2월 3일에 작고하고 설창수는 1년 후인 1998년 6월 6일에 작고한 것을 감안하면 미발표작인 이 원고는 어쩌면 설창수의 마지막 유고일 수 있다.
1997년 2월 3일 하기락이 작고하고 대한철학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지면서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여기에 설창수와 구상은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16이때 설창수에게 전화를 하여 고문직 수락을 받은 것은 하기락의 제자인 김주완이다. 이때 설창수의 음성은 노인스럽지 않고 매우 우렁찼던 것으로 김주완은 기억하고 있다.
□ 김춘수와 하기락
하기락(1912~1997)과 김춘수(1922~2004)의 만남은 1960년으로 보인다. 당시 하기락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친구인 청마 유치환의 소개로 김춘수를 해인대학(현 경남대학)에서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교수로 초빙하였다. 아래 김춘수의 글에서 확인된다. 유치환과 김춘수는 경남 통영을 동향으로 하고 있으며 1945년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이 함께 야간학교를 운영한 사이였다.
1960년 봄 새학기에 나는 마산에 있던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교)에서 대구의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때 문리과대학장이시던 허유虛有 하기락河岐洛 선생께서 주선해주셔서 그렇게 됐다.
하박사는 아나키스트이시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방면의 이론가로서 알려져 있었다. 청마 선생과 친구 사이라서 청마가 그분에게 나를 소개해 주셨다.
- 김춘수, [시가 있는 이 한 컷] 미당의 얼굴이 참 젊다 부분 17
통영 소재 <김춘수 유품 전시관>에 게첩된 김춘수 연보에는 1961년 4월에 김춘수가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부임 일자가 1년 늦게 잘못 표기된 것으로서 명백한 오류이다.
그후 하기락은 1966년 동아대학교 초빙교수로 옮겨 가고 김춘수는 1979년에 영남대학교로 옮겨 간다. 그러니까 1960년~1966년 사이 7년 간 하기락과 김춘수는 같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근무한 것이다.
이러한 친분이 김춘수로 하여금 철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했을 수도 있다. 김춘수는 1970년 1학기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창작론> 강의에서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춘수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꽃」은 다음 인용문과 같이 하이데거의 명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를 주제로 한 시이다. 하이데거에 대한 김춘수의 관심은 하기락의 영향일 수가 있다. 하기락은 1940년 와세다대학 졸업논문으로서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의 문제>를 썼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1940년~1942년 김춘수가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 재학 당시 일본 철학계에 풍미했을 수도 있는 하이데거 연구 풍조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김춘수의 시적 직관과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가 시공을 초월하여 우연하게도 일치한 것일 수도 있다.
언어는 어떻게 하여 존재의 집이 되는가? 존재는 이름을 가진다. ‘산’이라는 ‘존재’는 ‘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산’이 된다. 우리가 사물을 파악하고 사물로 다가갈 때 반드시 이름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물’이라는 말을 통하여 ‘물’을 알게 된다. ‘통한다’는 것은 ‘통과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말을 통과하여 사물로 나아간다. ‘기린’이라는 언어를 모르면서(통과하지 않고) ‘기린’이라는 동물을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는 그림책으로 공부한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존재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 없는 존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없는 것이 된다. 이름 없는 존재에 어떤 이름을 붙여서 불러줄 때 비로소 그 이름을 통하여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름 없는 것이 이름 불릴 때(언어의 집에 들어갈 때) 존재는 없는(無) 존재에서 있는(有) 존재가 되는 것이다.
김춘수의 시 「꽃」은 하이데거의 명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를 가감 없이 시에 담아낸 명시이다. 꽃이라고 이름 불러 주기 전의 존재는 아직 꽃이 아니다. 하나의 몸짓이다. 하나의 허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꽃이라고 이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꽃이 된다. 다른 누군가 그를 꽃이 아니라 눈물이라고 이름 불러 준다면 그는 그에게로 가서 눈물이 되었을 것이다. 존재는 이름 불러 주어야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름은 말(언어)로 불러 준다. ‘이름’은 명사이고 ‘불러준다’는 동사이다. 명사와 동사만이 말인 것은 아니다. 형용사와 부사, 감탄사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불러준다’라는 명제는 형식적으로는 명사와 동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모든 말을 포괄한다. 명사는 물론이지만 동사와 형용사 등 모든 말이 언어의 집이다. 말로 불러줌으로서 존재가 자신의 집에 자리 잡아 실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18
김춘수는 하기락을 주제로 하는 시를 3편 썼다. 다음과 같다.
안다르샤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고
그들 곁에
머루다람쥐가 와서 엎드리고 드러눕고 한다. 그
머루다람쥐의 눈이 거짓말 같다고
믿기지 않는다고
장군 후랑코가 불을 놨지만, 너
천사는 그슬리지 않는다.
안다르샤,
머나먼 서쪽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그러나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피지 않는다.
* 아나키스트 하기락(河岐洛) 선생의 아호
― 김춘수,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전문
이 시는 2001년 10월 30일 조선일보에 정과리에 의해 소개된 듯하며 다음과 같은 <추천 노트>가 달려 있다.
▲추·천·노·트
시인이 직접 주를 달아 허유 선생은 '아나키스트 하기락(河岐洛) 선생의 아호'라 하였다. 안다르샤는 ‘스페인령(領), 1930년대 아나키즘의 본거지’라고 또한 주가 달려 있다. 이 시는 아나키즘에 관한 시이지만 시의 본문에는 정치적 내용이 흔적도 없다. 시인의 눈으로 보기에 아나키즘은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고 그들 곁에 다람쥐가 와서 엎드리고 드러눕고 하는” 자연 그대로의 삶과 동의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키즘은 정치적 이념이라기보다 모든 체제며 제도며 전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순수 자연 아니 순수 자연이고자 하는 의지를 가리킨다. 그런 의지가 존재할 수 있을까를 의심하며 스페인의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불을 놓았다.” 그러나 그 의지의 천사는 “그슬리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슬리지 않긴 했지만 그 의지가 꽃을 피울 수는 없었다. 영원히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그 불가능한 순수 의지를 우리 마음 속에 조용히 불러일으킨다는 데에서 개화한다.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이 시가 피었다. 시란 이런 것이다. 불가능성을 불가능성 자체의 현존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시는 문명도 테러도 아니다. 불가능성을 불가능성 자체의 현존으로 제시하는 시는 문명을 반성케 하며 동시에 테러도 반성케 한다.
(정과리 문학평론가ㆍ연세대 국문과 교수)/조선(2001.10.30)
이 시의 제목은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이다. 허유 선생은 <아나키스트>이고 토르소는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이다. 머리가 없이는 방향을 잡을 수가 없고 팔다리가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멋이 있는 조각상이다. 이 시는 멋있지만 몸통만 있는 아나키즘의 실현 불가능성에 대한 연민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시즘이 가지고 있는 잉여가치설, 프롤레타리아 혁명론, 계급투쟁설 같은 투쟁을 뒷받침하는 방법론적 이론이 아나키즘에는 부족하다. 아나키즘은 아직 한 번도 정치제도에 도입된 적이 없는 이념이며 이론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이 시는 아나키스트 하기락에 대한 연민이며 동시에 김춘수 자신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다. 김춘수는 동경 유학 시절인 1942년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하였다는 죄목으로 일본대학에서 퇴학당하고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이 경찰서에서 6개월 유치 후 국내로 송환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현실적 한계에 대한 처절한 자기 인식을 투영한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인仁을 말하고
노자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을 말할 때
개가 달 보고 짖어대고
지구가 돌고 도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밤 아홉시 뉴스시간에
KBS 화면에
모택통이 평등을 말하고, 한참 뒤에
허유虛有*선생이 자유를 말할 때도
한 아이가 언제나 울고 있다.
엄마 배고파,
*아나키스트 하기락(河岐洛) 선생의 아호
― 김춘수, 「제18번 비가悲歌」 전문
이 시는 현실 정치의 기만성과 이념의 공허성, 약자의 숙명적 빈곤과 허약성을 주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이 「제18번 비가悲歌」인 것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슬픈 노래>라는 의미인 것 같다. 김춘수의 시니컬한 현실 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하기락과 김춘수는 자주 만났으며 만날 때마다 하기락은 아나키즘과 자유를 얘기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기락의 회갑 기념 논문집에 실린 김춘수의 축시 한 편이 있다.
길을 찾아 學을 닦는
쉬임없던 그 사이
시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어느덧 先生 回甲을 맞으셨습니다.
哲學은 愛知라,
知를 사랑하면 얻게 마련인
깊고 넓은 슬기로
先生 生涯의 포부를 펴고자 하셨습니다.
知는 知에 그침이 아니라,
知는 항상
더욱 뜨겁게 겨레와 그 義를
사랑하는 길잡이였습니다.
先生 六○平生은
길을 위한 學과
보다는 겨레와 義를 위한
뜨거운 사랑의
쉬임없는 시간의 흐름이었습니다.
시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어느덧 先生 回甲을 맞으셨습니다.
先生 사랑을 흐르는 시간은
그러나 지금도 아직 젊고
싱싱합니다.
先生 사랑의 (겨레와 義를 위한)
아직도 더운 그 입김,
그 젊음 그 싱싱함,
길이 정정하소서.
― 김춘수, 「길이 정정하소서 - 虛有 河岐洛 님 頌壽」 전문 19
□ 박노석(본명 박영환)과 하기락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인 박노석(1913~ ? )은 하기락보다 1년 연하지만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동년배로 태어나서 서당도 동문학이요 보통학교도 동기동창으로 6학년 졸업반 때는 한 짝지였고 그(하기락)의 사랑채에 공부방을 차리고는 조석으로 같이 동기간처럼 붙어 다녔다” 20고 한다. 본명은 영환이다. 자타가 모두 호를 줄기차게 사용해서 나중에는 호가 본명처럼 굳어진 사람이다. 문단의 마당발이라 할 만큼 폭 넓은 교류를 하였으며 청빈하게 한 평생을 살았다. 박노석은 키가 170cm 정도로 하기락보다 조금 작았지만 두 사람 모두 군살이 없는 마른 체형으로 강건한 골격을 갖추고 있어서 산행하기를 좋아했다.
박노석이 교유한 사람들은 크게 아나키스트와 문인들로 나누어진다. 그중 문인, 화가들로는, 공초 오상순, 월탄 박종화, 향파 이주홍, 청마 유치환, 화가 내고 박생광, 화가 강신석, 김동리, 미당 서정주, 파성 설창수, 황순원, 화가 이중섭, 구상, 조지훈, 김춘수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인데 모두 찾아 거명하기가 쉽지 않다. 박노석의 일흔 생일 축하연에서 김동리가 축사를 하는데 “노석은 시를 쓰는데, 시보다는 술을, 술보다는 친구를 더 좋아한다” 21고 하였다는데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폭 넓게 사람을 사귀었는지 짐작이 간다. 작품집을 몇 권 남기지 못한 박노석이지만, 칠순 기념으로 묶어낸 『백운산 뻐꾸기』 는 향파 이주홍이 의장을 하고 서문을 썼으며, 허유 하기락이 내제제자를 쓰고 구상이 발문을 썼을 정도로 그 내용이 화러하게 꾸며진 책이다.
박노석이 회고하는 일화 하나를 옮겨본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문총구국대 경남지대의 지대장을 유치환이 맡고 박노석이 사무국장을 하고 있었다. 이선근 정훈국장의 연락을 받고 보조금을 타러 박노석이 대구에 갔다. 대구로 피난을 내려온 문총구국대는 김광섭이 대장을 맡고 있었고 본부의 문학인들이 영남일보 건너편(대구 중구 서문로)의 감나무집의 큰방 한 칸을 빌려 20여 명이 합숙을 하고 있어서 박노석도 거기 가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용무를 마친 다음날 서정주, 조지훈, 박노석은 국회의원 범부(凡父) 선생을 찾아가 술자리를 벌인다. 범부 선생의 통달한 재담이 계속되고 조지훈과 서정주도 끼어들고 하여 술자리치고는 최상의 것이었다. 통금시간(비상계엄령 아래 오후 7시)이 되어서야 주석을 파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연하자라 해서 조지훈을 앞에 세우고 행군을 하듯 걸어갔다. 거리에는 무장 군인들이 깔려 있어 삼엄한 전시가 실감되는 상황이었다.
대구경찰서 건너편 헌병대 앞에 이르자 보초를 서던 한국군인 두 사람이 이들 세 사람을 제지하고 심문을 했다. 앞서가던 조지훈이 우리는 문총구국대 소속이며 나 자신은 고려대학 교수로서 아무개라고 신분을 밝히는 모양인데 그 졸병은 문총구국대가 무엇인가 알 턱이 없는지 그것은 문제로 하지 않고, 대뜸 한다는 소리가 대학교수? 우리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왔어! 하고 내뱉으며 지훈을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지훈은 노발대발 호통을 치는데 그렇게 되자 이제는 병정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합세를 하여 조지훈을 끌고 들어갔다. 서정주와 박노석도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가니 헌병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묻는 것도 없이 대뜸 이 자식들은 뭘하는 자식들이야? 하고 중구난방의 욕지거리를 하였다. 항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몽둥이로 매질을 해대는 판국이니 무법천지 바로 그것이었다. 불문곡직 세 사람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고 흑인 헌병이 운전하는 드리쿼터에 실려 다른 곳으로 또 끌려갔다. 대구시의 변두리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 임시로 만든 구치소였는데 책상과 걸상으로 칸을 만든 감방으로 세 사람은 구속이 되었다.
조지훈과 서정주는 문총구국대 소속으로 총칼은 없지만 공산주의와 싸우는 전우인데 졸병들이 무지하여 구타와 심지어 구속까지 당하게 되니 억울하고 한심하고 분했지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처지에서 그 정도에 그쳤으니 망정이라 생각했다. 전쟁이 가져오는 부조리와 비인간적 만행의 무서운 단면을 절감하였다. 누워 있는 마루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사과 몇 개를 주워서 나누어 먹으며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헌병이 와서 세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수필가 전숙희의 부군인 모대령(군의관)이 책임자인 듯 세 사람을 반겨 맞으면서 “아! 어찌된 일입니까?”하는 것이다. 아마 그날 밤의 구치자 명단에서 세 사람의 이름을 보고 긴급히 찾아와 풀어주는 모양이었다. 22
하기락과 박노석의 소년 시절에 안의면에는 “<아나키즘> 사상이 수입되었고 청년들 사이에 크게 운동을 일으켜서 담박에 신사조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23고 한다. 안의면이 소재한 서부경남은 그 지리적 조건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지역인 변방이라 신사조가 유입되기가 쉬웠던 것 같고 따라서 반골 기질이 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0대 후반의 하기락과 박노석, 하충현(하기락의 아우) 등은 <죽림 6인 클럽>을 만들어서 산으로 들로 몰려다니며 모의를 했다. 이들은 우선 하계방학을 이용하여 소인극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각본은 「코르시카 도(島)의 비극」과 「황금광소곡」을 선택하고 여자 역을 맡아줄 사람으로 진주에서 기생 노릇을 하는 삼랑(森娘) 24을 어렵게 섭외하여 연습을 한 후 경찰에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그랬더니 경찰에서는 하기락과 박노석을 제외하면 허가를 해 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빠지면 소인극은 와해될 수밖에 없어 대책을 논의하는 클럽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허유(하기락)는 비장한 얼굴로 석유 한 통이면 되니 경찰서를 불태우자는 발언이었다” 25고 박노석은 회상한다. 여기서 우리는, 1930년 6월 14일 첫날 공연부터 풍속괴란(風俗壞亂)의 죄명으로 종로서의 검열에 걸려 120원의 벌금을 물었던 「황금광소곡」을 서부 경남의 작은 지역 안의면의 무대에 올리기로 한 것부터가 하기락과 박노석 등이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석유로 일제의 경찰서를 불태우겠다는 의지를 가진 10대 후반의 하기락의 혈관에는 자주와 자유를 추구하는 투사의 뜨거운 피가 벌써부터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기락은 그 후 “제2고보에서 광주사건으로 하여 퇴학을 당하고 1년 동안 방황을 하다가 나중에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한동안 50리 거리에 있는 <서상금융조합>에 근무한 일이 있는데 그때 우리 <6인 클럽>은 매 토요일 그의 귀가를 기다려 죽림밀회를 가졌다” 26고 박노석은 회상한다. 이들은 이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도일을 도모하였는데 하기락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박노석은 부산에서 낙오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기락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한때 황해도 재령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으나 곧 그만 두고 해방 전 몇 해 동안을 줄곧 고향에 있었다.” 27이 시기는 해방 직전의 5년간으로서 일제의 강압이 최고조에 달하고 태평양전쟁(1941~1945)의 강제 징집이 한반도를 샅샅이 뒤지던 때이다. 이러한 시기에 젊은 지식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피신과 은둔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해방 후 하기락은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한국자유농민조합을 창설하고 조합장에 피선된다. 그러나 서울에서 개최된 농민조합대의원대회장에 게첩된 <스탈린과 모택동 동지 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보고 그 자리에서 농민운동을 버린다. 28박노석은 잠시 좌익운동에 동참하다가 발을 뺀다. 두 사람은 자주ㆍ자립ㆍ자율적 건국이념을 관철하기 위하여 언론 쪽으로 관심을 돌려 <자유민보>지를 창간하고 팸플릿지 <자유연합> 29을 발간하였으나 군정당국의 조치에 의해 중단되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하기락과 박노석이 함께 활동한 운동 내역은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29일 서울시 종로 2가 소재 연맹결성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개최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약칭 자련, F.S.B.F.) 창립회의에 하기락과 박노석은 함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행정의 지방자치와 산업의 노동자 관리를 요구하는 4개항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30
좌우익이 각각 정부수립 준비기관을 구성할 즈음인 1946년 2월 21일~22일 부산 시내 금강사에서 <경남북아나키스트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하기락이 개회사를 하고 박노석이 임시의장이 되어 회의를 주재하였으며 국가수립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천명한 대회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과도정권수립 최고기관에 발송할 건의문 작성위원을 선출하였는데 하기락과 박영환(박노석) 등이 포함되었다. 대회성명서는 자주적 정부수립과 자립 경제체계 확립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좌익을 부정하고 우익에게는 방향을 제시하는 성명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 역사이론을 일차원적 단순한 공식으로 규정하면서 배격하고 계급투쟁의 사회주의 노선을 부정하면서, 계급대립의 완화와 조절을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 세계적 부의 분배가 강대국 독점 방식이 아니라 약소민족과 노동자에게도 균점토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후진국 자체 내의 생산자계급의 해방과 활성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민족에게 부과된 중대한 과업은 자립ㆍ자주적 경제체계 확립과 산업의 민주화이다.
이러한 원칙에 의거하여 과도정권이 수립될 것을 요구한다.
1.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정부수립
2. 통일된 민족의 기반 위에서의 정부수립
3. 지방자치의 확립
4. 모든 생산수단은 근로인민에 의하여 관리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31
경남북아나키스트대회가 있은 2개월 후 1946년 4월 20일~23일에 경상남도 안의에서 <전국아나키스트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이을규, 이정규 외 다수 맹원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림, 박성홍 외 다수 맹원이 출석하였다. 국제정세보고를 시작으로 국내정세보고, 의제 상정, 토의, 합의를 거쳐 <정부수립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원칙>, <정부수립에 대한 우리의 당면 실천방안>을 발표하였다. 이 대회의 실무를 하기락과 박노석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6년 7월 7일 “정당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혁명집단” 32이라고 할 만한 독립노농당(위원장 유림)이 결성되고 동년 10월 1일 영남폭동사건(일명 10.1. 사건) 조사보고, 미군정 자문기관인 입법의원 개원, 노농청년총연맹 결성, UN 임시조선위원단 입국과 북조선방문의 거부, 남조선 단독선거, 남북협상의 실패, 한국전쟁, 부산정치파동 등의 격랑을 거치는 가운데서도 아나키스트운동은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10월 3일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립노농당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구특수위원회가 발족되는데 하기락이 위원장을 맡고 하기락의 제자인 채수한, 김상현, 박정옥, 남서순 등이 산하 6개 부의 부장 직책을 나누어 맡았다. 33하기락은 1947년부터 대학 강단으로 진출하여 이때는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였던지라 여러 제약을 받아 1953년 말에 위원장직을 물러났다. 4ㆍ19 혁명, 유림 서거, 5ㆍ16 혁명과 활동분자 투옥 등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의 거점이던 독립노농당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가 10년 후 정치활동이 해금된 1972년 2월에 양일동, 정화람, 하기락 등이 동조자를 규합하여 <민주통일당>을 조직하여 새로운 정치활동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하기락은 정책위 의장을 맡아 당의 기본정책을 책정한 후 곧 대학강단으로 복귀하였다. 34그러나 이 민주통일당마저 10년 후에 전두환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와해되었다.
1972년 6월 22일 서울 진관사에서 한국자주인연맹이 결성되어 제3차 대표자대회를 열고 6개 항의 강령을 채택하고 7개 항의 규약을 정했는데 이후 한국 아나키스트 창건자인 이을규, 박열, 정현섭, 이정규 등이 작고하면서 운동의 힘은 쇠약해졌다. 1981년 1월 25일 작고한 화암 정현섭의 영결식에서는 아나키스트 동지를 대표하여 하기락이 조사 35를 써서 낭독하였다.
이후 15년 만인 1987년 8월 21일 하기락의 주도로 대구 계명대학교 대강당에서 제4차 아나키스트대회가 개최되었다. 36이날 행사에는 하기락의 개회사와 정세보고가 있었고 초청강연은 정만교와 구상이 맡았다. 이 대회에서 한국자주인연맹(FAK) 사무국 간사로 하기락 박영환(박노석) 등이 선임되었으며 <1988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세미나> 37 개최가 결정되었다. 38
□ 구상, 석우 이윤수, 김주완과 하기락
구상(1919~2004), 석우 이윤수(1914~1997), 하기락(1912~1997)은 1950년대부터 대구에서 친교를 가졌던 사이다. 김주완(1949~ )은 1984년 구상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이후 구상의 사사를 받았고, 1983년부터 하기락의 말제자로 문하에 입문하여 하기락의 작고 시까지 사사하였다. 따라서 김주완은 철학계에서는 하기락의 제자이고 문단에서는 구상의 제자가 된다. 이윤수는 1945년 해방을 맞아 대구에서 유치환 등과 함께 죽순시인구락부를 창립하고 전국단위의 잡지 《죽순》을 창간하여 작고 시까지 발간하면서 구상과는 의형제로 지냈다. 이윤수는 경북문협 제8대(1972~1973) 39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주완은 1987년 《죽순》 40회원으로 참여하여 1996년까지 작품을 실었다. 이런 연고로 하기락, 구상, 이윤수, 김주완의 관계는 함께 서술하기로 하며, 여기서는 1984년 이후의 일만 다룬다.
88 서울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87년은 6ㆍ10 민주항쟁 41으로 지칭되는 민주화운동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 등으로 혼란을 겼던 시기이다. 6월 항쟁의 막바지 절정이라 할 수 있는 1987년 6월 26일의 대구 실황과 아나키스트 하기락의 모습을 김주완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역사의 구비마다 되풀이하여 들려오는 존재의 부름을 하기락은 계속하여 들었을 것이다. 노도와 같은 4.19의 젊은 함성, 지축을 울리던 5.16의 탱크소리, 10. 26 심야의 권총소리, 12.12의 군화소리, 창공을 치솟던 5.18 광주의 한 맺힌 절규, 존재의 소리는 처절하였거나 또는 무자비하였고, 그 때마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더욱 강화되어 갔을 것이다.
1987년 6월 26일 화요일 오후, 하기락은 금호커피숍에서 재야인사 몇 사람과의 면담을 끝낸 뒤 반월당 네거리에 있는 덕산빌딩 2층의 덕산커피숍으로 옮겨 앉았다. 훗날 6월 항쟁으로 불리워지는 대규모 민중시위가 이즈음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당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고문으로 있었던 하기락은 때때로 불려나가 대중연설을 하였다. 이 날은 연설이 없었던 것 같았다. 덕산커피숍의 남쪽 통유리 창 옆에 자리 잡은 하기락은 커피가 식어 가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앞산 그리메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반월당 네거리 동서남북 각 방향에서 차도를 가득히 메운 시위 군중이 교차로를 향해 노도처럼 몰려들었다. 전투경찰이 쏘는 최루탄과 시위군중이 앞세운 대형 깃발이 밀고 밀리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 자유와 민주를 되찾기 위한 민중의 함성을 하기락은 가슴으로 듣고 있었다. 이때 하기락과 같이 자리하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인 필자(김주완)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 공방전이 계속되는 반월당 네거리를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밀폐된 통유리창이었지만 어디로 새어들어 오는지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어느새 커피숍 안을 채웠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지만 하기락은 간혹 눈물을 닦아내며 앉아 있었고 필자 또한 그렇게 끝까지 앉아서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듣는 하기락의 모습을 목도하였다. 42
이로부터 3일 후인 같은해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직선제가 수용되면서 6월 항쟁은 종료되었다.
하기락, 이윤수, 구상의 다정다감했던 친교를 김주완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87년에서 1990년 사이에 구상 선생님이 대구에 내려오시면, 한국 현대철학 제1세대 철학자이면서 아나키스트인 하기락(虛有 河岐洛:1912~1997) 선생님, 이윤수(石牛 李閏守; 1914-1997) 선생님이 자리를 함께 한 적이 몇 차례 있다. 세 분은 1950년대부터 대구에서 친교를 가지셨던 사이이다. 나는 늘 배석했다.
구상 선생님과 하기락 선생님은 1987년 이때 당시 이미 35년 지기(知己)였다. 1953년 구상 선생이 영남일보사 주필로 취임하고 같은 해 하기락 선생님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주임교수로 부임하면서 두 분의 교분이 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당시 하기락 선생님은 아나키스트 단체가 중심이 되어 설립(1946.7.7)한 독립노농당 경북특위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구상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한 저항으로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펴내었다.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6년 후인 1959년에 이르러 구상 선생님은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대구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다 같이 비판적 입장에 섰던 두 분이 가까워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구상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당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고 아나키즘에 반드시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기락 선생님이 주관하는 아나키즘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으며, 하기락 선생님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에서 같이 어울려 술추렴도 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대구 동인호텔 부근에서 두 분이 함께 하신 술좌석에 필자(김주완)가 배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두 분은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무척 재미있어 하셨다. 구상 선생님은 하기락 선생님을 허유 형이라 호칭하고 하기락 선생님은 구상 선생님의 호인 운성(暈城, 구상 선생의 호는 잘 불려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본명이 常浚이며 常은 필명인데, 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이라 불렀으며, 말씨는 상호간에 편한 높임말을 썼다. 두 분의 이야기 내용은 이러하다. 삼십 수년 전 경남 안의 용추계곡에서 여럿이 어울린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한창 흥이 고조되었을 때 남자끼리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하여 같이 어울릴 여성을 동원해 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 일을 해 낼 것인가이었으며 바로 여기에 선발된 자가 좌중에서 외모가 가장 준수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기락 선생님과 구상 선생님이었던 모양이다. 두 분은 무거운 임무를 띄고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구상 선생님은 소득 없이 돌아왔고 잠시 후 하기락 선생님은 한복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여성을 대동하고 점잖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성은 그날 그 자리에 참석 예정으로 있었던 어느 분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40대 전반과 30대 후반의 하기락 선생님과 구상 선생님의 호기는 대단했던 것 같았다.
1987년 7월 25일 강원도 속초 영랑정에서 열린 한국자유시인협회의 문학 심포지엄에서 구상 선생님이 초청 특강을 하셨다. 대구에서 올라간 하기락 선생님, 이윤수 선생님과 함께 나(김주완)는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날 밤 우리는 영랑호반에 있는 콘도에서 잠을 잤다. 멋쟁이 원로시인 이윤수 선생님은 중년의 여류 시인들에게 끌려 나가 밤을 새웠고 하기락 선생님과 나는 T.V를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에 구상 선생님은 서울로 상경하시고 우리는 마등령 등정을 하고 백담사에서 다시 1박한 후 대구로 돌아왔다.
이 날로부터 한 달도 안 되는 같은 해 8월 21일에서 8월 22일까지 2일간 대구 계명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아나키스트연맹(Federation of Anarchists in Korea) 제4차 대표자 회의에서 구상 선생님은 초청강연을 하게 되는데, 아마 속초에서의 이 만남에서 하기락 선생님이 초청하고 구상 선생님이 수락하여 이루어진 특강으로 알고 있다. 43
마등령 등정 이후에도 하기락과 이윤수를 중심으로 한 산행은 지리산과 가야산, 기백산과 팔공산 등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때마다 잊지 못할 기억들이 만들어지고는 하였다. 효성여대 교수이자 수필가인 최정석도 간혹 합류하였다.
대구권의 니콜라이 하르트만 학자들의 윤독회와 하기락과 이윤수에 대한 회고를 김주완의 다음 글에서 살펴보자.
1987년 10월 27일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9차 개헌에 대한 국민 투표가 있었고, 개정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같은 해 12월 17일 실시되었다. 비록 각색된 허상이기는 하였지만 국민대중은 무지갯빛 민주화의 꿈에 부풀어 있었고 사회·정치적 이슈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올림픽 서울개최의 해인 1988년은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기락의 눈에는 그러한 사회·정치적 변화가 그리 만족스럽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참된 자유를 바라보고 추구하는 노철학자의 눈에 얄팍한 술수로 분장한 현실정치의 실체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대중음식점은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뉴욕피자호프에서 피자로 식사를 때우는 그런 경우에는 으레 한나절 이상의 시간을 우리는 각종 사회현실과 국가의 실체, 자유의 본질 등에 대하여 열변을 뿜어내는 하기락의 살아있는 강의를 들어야 했다. 더러 원로시인 석우 이윤수(石牛 李閏守; 1914-1997) 선생이 우연히 합석하여 40년 지기의 우정과 정심(正心)으로 동조하며 분위기를 가열시키기도 했고 그럴 때의 하기락과 이윤수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날의 그들로 돌아가 자못 가열찬 주장과 현실 비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다. 두 분 모두 순정이 강했던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기락은 자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하였다. 속눈썹이 수정체를 향해 솟아나는 현상 때문에 그렇기도 했겠지만 노안으로 몇 시간씩 독회를 하느라 작은 활자의 원서를 들여다본 직후에 담배연기가 자욱한 호프집에 앉아 다시 몇 시간을 보내느라 더욱 그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래 앉아 있기가 민망하여 필자는 몇 번씩 커피를 다시 시켜 마신 기억도 있다. 그럴 때 하기락과 이윤수는 커피대신에 생맥주를 시켰다. 술자리에선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술을 마시는 주류파로서 김태양이 원로 철학자와 원로시인의 술시중을 들며 대작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김태양은 특유의 호인 웃음을 자주 웃으며 하기락과 이윤수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그래서 하기락은 우리 중에서 특히 김태양을 총애했던 것 같다. 차분히 무르익는 술자리에서 하기락의 눈가로 자주 스쳐 지나가는 우수의 그림자를 필자는 읽곤 하였다. 하기락의 우울과 눈물은 어쩌면 시대와 역사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필자(김주완)는 문득문득 하곤 하였다. 이 때의 정경을 그린 필자(김주완)의 다음과 같은 졸시가 있다. 44 45
겨울 저녁비 내리고
젖은 도시의
거리는 추상의 옷을 입는다.
변형의 계절에 앉아
뼈 추리는 작업 깊은
노안의 철학자는 힘이 들까,
더러 눈물 나고
눈꺼풀 찌르는 속눈썹 아픈
가슴의 빗소리
잠시 머물다 지나간 사람들의
부서진 숨결들이 되살아나는
토요일 오후 네 시,
봉산동 지선도로변 뉴욕 피자호프의
구석자리 이방에서 일던 안개숲 속
앓는 공화국의 우울한 침묵이
비에 젖는다, 아득히
먼저 떠난 아나키스트
맑고 맑은 이국의 동지들과 마주앉아
커피값으로 마시는 생맥주잔 너머
역사가 빨아낸 자유의 빛깔은
당신의 눈 속에 흐리고 흐리다,
외계의 장마비 칼질하는 저녁 때.
― 김주완, 겨울 장마 -老哲學者 虛有 河岐洛 先生 전문 46
‘「인간의 해방」또는 「실존의 자유」, 이것이 나의 철학적 테마요, 또 목표였다’는 하기락의 언명은 철학자로서 아나키스트였던 그의 입장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철학과 아나키즘을 따로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구현되는 아나키 사회의 실현이 그의 삶의 목표였다면, 그러한 목표달성을 위하여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이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락의 자기과업으로서의 철학적 업적은 방대한 분량과 넓고 깊은 내용의 연구 실적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삶의 목표로서의 아나키 사회 건설을 위한 그의 헌신은 민중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계몽의 노력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47
타계 1주일 전 하기락의 모습을 김주완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작고 일주일 전인 1997년 1월 27일 대전시 유성구 경회루 식당에서 열린 <대한철학회 97 국제학술대회 발표자 예비모임>에 본 대회 기조연설을 맡았던 하기락 선생은 회의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허겁지겁 시간에 대어 들어서는 우리에게 노안의 환한 미소를 보내 주셨다. 중요 안건 처리가 끝날 때쯤 하기락 선생은 서울행 열차표를 예매해 둔 사정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이윤복(경북대)과 필자(김주완)가 큰 길 까지 모시고 나와 사양하시는 선생님의 속주머니에 약간의 용돈을 넣어 드리면서 택시를 태워드린 것이 필자가 뵌 하기락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997년 2월 3일 10:00시경 선생은 자택에서 출타준비를 하던 중 쓰러져 타계하셨다. 그 후 대한철학회 97 국제학술대회(주제: 통일시대의 철학) 기조연설은 대한철학회 회장 김위성(부산대) 교수가 대신 맡아서 같은 해 5월 31일에서 6월 1일까지 부산대학교 본부동에서 치루어졌다. 48
하기락이 타계하자 김주완이 앞장서서 대한철학회장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례를 거행하였는데 장례위원회에는 경북대학교 총장과 계명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한명수, 시인 구상, 시인 설창수 등이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1997년 2월 6일, 경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4일장으로 거행된 영결식에서 사회는 뒤에 원광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도종이 하고 영결사는 당시 대한철학회장으로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부산대학교 김위성이 하였으며 김주완은 자작 조시를 낭독하였다. 그후 1주기 추모 학술지를 장윤수의 주도로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1998년 2월 발행)으로 묶었는데 민동근, 김주완, 김도종, 장윤수, 김성국 외 6명이 하기락을 주제로 한 논문을 집필하여 실었다. 이어서 김주완이 앞장서서 전국의 철학교수들을 대상으로 하여 <허유 하기락 박사 학덕비 건립>을 위한 모금을 전개하였으며 이 성금으로 2002년에 고인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 학덕비를 제막하였다. <허유 하기락 박사 학덕비 건립위원회> 조직에 있어서 구상, 김춘수, 이명현(전 교육부 장관) 등 3명이 고문으로 추대되어 이름을 올렸고 이들은 각각 성금을 협찬했다. 비문은 김주완이 짓고 비명(碑銘)은 채수한이 썼다.
영결식에서 낭독한 김주완의 조시는 다음과 같다.
Ⅰ.
선생님!
허유 선생님!
때 아닌 계절, 음력 섣달그믐에
저리도 자욱한 국화 숲에 누워서
가시나이까,
정녕 가시나이까.
지리산 백무동 골짜기를 밟아 올라
저물녘에 벽소령을 옆으로 끼고
표표한 발걸음으로 홀로 이르시던
세석평전을 거기 그대로 두고
저만큼 천왕봉을 거기 그대로 두고
노동자 농민이 자주인 되는 날이
아직도 아득히 멀기만 한데
힘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는
저 가련한 산업민주화는 어찌하라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와 “사회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가
서로 조화하여 21세기로 향하는
인류전체의 연대와 화평의 지침은 어찌하시고
가시나이까
선생님,
그리도 성큼성큼
정녕 가시나이까
허유 선생님!
Ⅱ.
선생님은 가셔도
그러나 가시지 않았으니,
대학의 도서관마다, 거리의 서점마다
연구실의 서가마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지주로 남으시고
후학들의 가슴에 심어진 말씀으로 있으시니
돌아보면 사방에 선생님이 계십니다.
세우신 학문과 닦으신 실천이
높고 맑아 고결하셨으며
고결하였으므로 타협을 싫어하신 성품은
때로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고
더러는 주변에 담을 쌓기도 하였지만
눈앞의 것보다 훨씬 먼 데까지 내다보는
지혜자의 순수한 모습은
마침내 대중을 끌어당겨
사상과 존재가 일치하는 진리보다
말과 사상이 일치하는 진실이
그보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성실이
진정한 도덕적 가치임을 깨치게 하여
제각기 최선의 자기를 건설케 하였습니다.
없음으로서의 있음,
항시 비워둠으로서 가득함,
허(虛)의 현실 저편에 빛나는 유(有)의 이상을
바라보며 노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천분임을
두 자 아호 허유(虛有)로 쓰시면서 가르치신
둔각을 깨뜨려 감싸 안는 예각적인 교훈이
저희에게 대하여 있는 한
선생님은 가셔도
영원히 가시지 않았나이다.
Ⅲ.
이제 선생님 가시는 곳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늘밭,
거기는
당신의 눈 속에 흐리고 흐리던
역사가 빨아낸 자유의 빛깔도 돌아오고
앓는 공화국의 우울한 침묵도 걷혀지며
생전에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시던
지리산 힘찬 준령
형제봉, 칠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을
아침 저녁으로 마주하여 대하시고
먼저 떠난 문인, 철학자 그리고 아나키스트
맑고 맑은 지인들과 만나시어
시원하게 넘쳐나는 담소를 종일토록 나누실 곳이오니
허유 선생님!
여든 여섯 해의 풍상과
칡넝쿨처럼 질긴 이 땅의 속박은 벗어시고
늘밭에서 고이 영면하소서.
맑은 새벽하늘
겨레와 철학과 자유를 지키는 별로 뜨셔서
남은 저희 오래 끌어 주소서.
1997. 2. 6.
― 김주완, 조시 「가셔도 가시지 않았으니」 - 허유 하기락 선생님 영전에, 전문. 49
하기락과 친교를 나누었던 시인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시 세계나 시 정신은 문학관이나 기념관의 진열장 속으로 들어가거나 또는 책장에 꽃힌 시집 속에 유폐되었다. 그들의 문학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그 면모는 찾아보기 힘이 든다. 기성 권위와 전통이 무너진 오늘날은 시와 문학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방향을 상실한 지점에서는 예측 가능한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영원한 자유인 하기락은 가고 하기락이 그처럼 간구(干求)했던 「인간의 해방」과 「실존의 자유」는 이제 후세대의 과제로 남겨졌다.” 50하기락이 양손에 잡고 있었던 철학과 아나키즘이 후세대의 손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철학은 경제 제일주의와 과학의 발전 논리에 밀려 사양화되고 있으며 하기락에 이어 니콜라이 하르트만을 연구하는 학문의 후속 연구세대 또한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사정이 다르다. 석학 김성국(1947~ )이 하기락의 아나키즘을 굳건히 계승하고 있다. 김성국은 세계적인 사회학자로서 사회학, 정치학, 철학, 문학을 폭넓게 섭렵하고 수용하면서 잡종사회를 화두로 하여 <아나키즘과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라는 그만의 독창적 사회사상을 건설하였다. 또한 이것을 동양적인 하나사상으로 수렴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무엇보다도 <하기락기념사업회> 출범을 서두르고 있다. 하기락의 철학은 깊은 동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김성국에 의하여 지금 새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하기락은 갔지만 2023년을 맞으면서 이제 그의 유품은 낙동강문학관에 남아 현대 한국 지성계의 큰 별로서 영롱히 반짝이게 되었다. 전적으로 유품을 수탁하고 전시 공간을 확보해 준 낙동강문학관 관장 박찬선의 통섭적ㆍ진취적 안목과 결단의 덕분이다. 원로 시인이자 한국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인 박찬선은 이번 일로서 한국의 문학관 운영의 새로운 지평을 개시(開示)한 것이다. 그가 옳았다. 이름은 행적 속에 담긴 의미로 남는다.
- 김주완(1949~ ) : 경북 왜관 출생, 1984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철학박사(대구한의대 교수, 대한철학회장, 한국동서철학회장, 새한철학회장 역임), 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 외,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외, 논문 「시의 정신 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 외 다수. 한국문학상ㆍ경북문학상ㆍ경북예술대상 수상. 한국문협 이사ㆍ경북문협 회장 역임. [본문으로]
- 『한국근대문학 해제집』, <청마시초>에는 “1927년 동래고보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 연희 전문 본과 1년을 다니다 중퇴하였다.”는 1년 차이가 나는 다른 기록이 있다. [본문으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1928) [본문으로]
- 『하기락 논문집』 제4권, 자주인연맹 발행, 1987. 「나의 수업시대」, 2~3쪽. [본문으로]
- 이정규(李丁奎 1887-1984) : 인천 옹진군 북도면 장봉리에서 출생 후, 인천상업(제물포고)을 거쳐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 중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의정원에 피선. 이후 임시정부와 국내를 이어주는 교통망 설치, 의친왕 망명 추진 등의 활동을 전개. 북경대학 경제학과에 편입. 각국의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 북경세계어전문학교, 이어 마프노 운동의 실현을 위한 복건성 이상농촌 건설, 상해노동대학의 설립에 관여했다. 우당 이회영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활동 중 일제에 피체되어 도합 7년여의 옥고를 치뤘다.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결집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하고 조선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조직, 선언, 강령을 기초하였으며 1947년 국민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1946년부터 교육에 투신하여 성균관대 부총장, 청주대 총장,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4.25 전국교수단 시국선언 발표 및 시위를 주도했다. 1962년부터는 국민문화연구소 회장으로 국민수산운동을 추진했다. 한평생 자유, 평등, 상호부조의 공동체 사회 건설과 인재 양성을 위해 진력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한국의 선구적이고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다. 1984년 향년 88세로 별세시 자신의 남은 전 재산을 국민문화연구소에 기증했다.(https://story.kakao.com/-aUzCQ/E1tNE85U620) [본문으로]
- 허유 하기락 박사 회갑기념논문집발간추진위원회(위원장 한명수), 『허유 하기락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형설출판사, 1972.09.15. 5쪽(연보) 참조. [본문으로]
- “나는 경남의 북변인 안의란 산골, 청마는 남해의 갯가 통영, 그렇게 상거해 있는데도 우리는 20대 청년시절부터 친한 벗으로서 사귀었던 것이다. 그가 이세(離世)하기 불과 1시간 전까지도 피아간 대작이었고, 줄곧 지우(志友)로서 허물없이 인생살이를 같이 즐겨 왔었다.”(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88쪽.) [본문으로]
- http://www.hygn.co.kr/2524 https://seelotus.tistory.com/7554 [본문으로]
- 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88쪽. [본문으로]
- 『세계평화국제회의 보고서』, 한국자주인연맹, 1988, 4~5쪽. (46배판 332쪽의 이 보고서는 한글 번역문과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등 원어문으로 작성된 발표문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 이 명단에는 청산리전투의 사령관으로 널리 알려진 장군 김좌진의 이름이 올라 있고, 김윤환(5선 국회의원)과 김태환(3선 국회의원) 형제의 부친으로 국회의원을 한 경북 구미시 장천면 출신의 김동석도 이름이 올라 있다. [본문으로]
- 유치환의 막내 동생인 유치담은 여기서 빠져 있다. [본문으로]
- T.K.단 사건 : 하충현이 진주농업학교 1학년 재학시(1930년) 항일투쟁 비밀결사 T.K.단이란 것을 조직하고 원고를 모아 책으로 철하여 <반역(叛逆)>이란 제호를 붙여 윤독하면서 강변과 산간에서 자주 비밀집회를 가지고 운동의 확대를 꾀했다. T.K.단이 주동이 되고 진주농업학교 제1,2,3학년이 호응함으로써 1931년 2월 18일 퇴학생 복교 등의 요구를 학교 당국에 제출하였으나 불응하자 맹휴에 들어갔다. 동년 3월 24일 T.K.단 20여 명이 검거되고 동년 여름에 진주서에 의하여 <반역(叛逆)>지가 발각됨으로써 지하조직이 탄로났으며 동년 11월 10일 10여 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진주지방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판결되었다. 박봉찬, 조용기, 하충현 이상 10개월 언도에 3년 집행유예, 김대기, 이덕기 이상 6개월 언도 3년 집행유예, 설창수, 전경집, 박몽세 이상 기소유예.(『하기락논문집』 제4권, 자주인연맹 발행, 1987. 「나의 수업시대」, 5쪽.) [본문으로]
- 『하기락논문집』 제4권, 자주인연맹 발행, 1987. 「나의 수업시대」, 5쪽. [본문으로]
- 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44쪽. [본문으로]
- 『철학연구』 제100집 기념 특별 부록 『흔적』, 대한철학회,2006.11.30., 439쪽. [본문으로]
- 계간 《시인세계》 2002 겨울 (2), 문학세계사, 2002.11.11.
http://www.mhj21.com/26791
https://sophia1949.tistory.com/382
http://munhwai.com/news/news_print.html?section=photo&no=394 [본문으로] -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문헌에서 이루어진다.
김주완,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계간 《시와 산문》, 통권 115호, 2022년 가을호, 서울:시와산문사, 2022.09.01., 180~183쪽.
김주완, 「구상 강문학의 존재론적 본질」, 『낙동강과 구상 시인』, 낙동강문학관, 2022.09.14. 157~161쪽. [본문으로] - 허유 하기락 박사 회갑기념논문집발간추진위원회, 『허유 하기락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형설출판사, 1972.9.15., 9~10쪽.(이 논문집의 발간추진위원장은 경북대학교 총장과 계명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한명수 박사가 맡았다.) [본문으로]
- 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250쪽.(「영향력 큰 죽마지우」-허유 하기락 형) [본문으로]
- 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45쪽. [본문으로]
- 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64~68쪽.(「다시 그때 그 일들」) [본문으로]
- 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250쪽.(「영향력 큰 죽마지우」-허유 하기락 형) [본문으로]
- 본명 김영애(金永愛), 진주일신여고를 중퇴한 후 일본 동경에서 유치진의 극운동 멤버로 활동했으며 이미 <위임장 2만원 사건> 등에 출연한 경력이 있었고 당시 진주로 돌아와 기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 박노석, 시와 수필 『백운산 뻐꾸기』, 1984.07.15., 태화출판사, 252쪽.(「영향력 큰 죽마지우」-허유 하기락 형) [본문으로]
- 박노석, 『백운산 뻐꾸기』, 252쪽. [본문으로]
- 박노석, 『백운산 뻐꾸기』, 25쪽. [본문으로]
- 박노석, 『백운산 뻐꾸기』, 254쪽. 참조. [본문으로]
- <자유연합>(Free Association) : 편집인 하기락. 발행인 박영환(박노석) 1946.4.1. 발행. [본문으로]
- <자유연합>(Free Association) : 편집인 하기락. 발행인 박영환(박노석) 1946.4.1. 발행. [본문으로]
-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9.20., 286~288쪽 참조. [본문으로]
-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9.20., 303쪽. [본문으로]
-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9.20., 335쪽 [본문으로]
-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9.20., 353쪽. [본문으로]
- 조사 원문은,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9.20., 357~359쪽. [본문으로]
-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9.20., 364쪽. 자주인(아나키스트)연맹 제4차 대표자대회에는 서울, 부산, 인천, 춘천, 대구, 마산, 진주, 함양, 양산, 기타 지역에서 참석한 50여 명 대표와 시민 학생 등 다수가 방청하였으며 다음날(22일)은 경남 안의고등학교 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속개되었다. [본문으로]
- 이 세미나는 하기락이 주도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회의>라는 명칭으로 1988.10.28.~31. 4일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되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각주 9)~11) 부분에서 간략히 소개되고 있다. [본문으로]
-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9.20., 388쪽. [본문으로]
- 이 때는 대구ㆍ경북 행정구역 분리(1981.7.1.) 이전이다. [본문으로]
- 《죽순》에 대한 이윤수의 자부심과 애정은 대단하였다. 우방주택의 협찬을 받아서 원로 문인들의 작품을 받아서 잡지 발간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화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했다. 생전에 《죽순》 후계자를 선정한다고 처음에는 박곤걸(1935~2008)을 마음속에 두었으나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고 1990년대 초에는 김주완(1949~ )을 지명한다고 하다가 김주완이 재직 대학에서 여러 보직을 맡으면서 문단활동에 전념하지 못하자 이 또한 무산되고 이윤수는 결국 생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본문으로]
- 6ㆍ10 민주항쟁은 전두환이 1987년 4월 13일 발표한 4ㆍ13 호헌조치에서 출발한다. 이에 항거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같은 해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열기로 한다. 이 대회를 하루 앞두고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연세대학교 재학생 이한열이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요절하였다. 로이터 통신 기자에 의해 그 순간의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에 실리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전두환은 군부를 동원한 무력진압을 준비했지만 당시 88 올림픽 직전의 대한민국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결국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되면서 사실상 6월 항쟁이 종료되었다. [본문으로]
- 김주완, 「하기락과 자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 1998.02., 39~40쪽. [본문으로]
-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언령』 제14집, 동아출판사, 2019.11.20., 34~37쪽. [본문으로]
- 하기락 선생은 속눈썹이 자라나 수정체를 찌르는 고통 때문에 일주일에 한차례 이상 병원에 나가 속눈썹을 뽑아내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성형외과에서 이에 대한 근본치료로서 쌍꺼풀 수술을 시술한 적이 있었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하였으며, 운명할 때까지 이 고통과 번거로움은 계속되었다. [본문으로]
- 김주완, 「하기락과 자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 1998.02., 26~27쪽. [본문으로]
- 김주완, 「하기락과 자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 1998.02., 27쪽.
김주완, 시집 『엘리베이터안의 20초』, 도서출판 한줄기, 1994, 83쪽.
하기락 편집, 「자유연합」 제6호, 한국자주인연맹, 1989. 5. 1, 8쪽. [본문으로] - 김주완, 「하기락과 자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 1998.02., 41쪽. [본문으로]
- 김주완, 「하기락과 자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 1998.02., 25쪽. [본문으로]
-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100집 기념 별책부록, 『흔적』, 정림사, 2006.11.30., 448~451쪽. [본문으로]
- 김주완, 「하기락과 자유」, 대한철학회, 『철학연구』, 제64집, 1998.02., 4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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