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2021) 석정촛불시문학상 수상시]
집에 간다
김인숙
붉은 캥거루가 집에 간다
사막의 끝에서 날이 저물면 집도 집에 간다
집이 있어 집에 가고 집에 든 채 집에 가고 집이 없어도 집에 간다
집에는 엄마가 있고 엄마 속에 집이 있고 없는 집에도 엄마는 있다
나무는 선 자리에서 잠이 드는 노숙이여서
바람을 덮으며 등을 붙이면 눕는 자리마다 집이다
붉은 캥거루 새끼는
앞발로 안고 뒷발로 뛰는 엄마의 품에서 엄마의 엄마가 있는 집에 간다
엄마도 나도
집은 비를 맞아도 집이다
비가 새도 집이다
엄마가 없어도 엄마는 있다 갈 데가 없어도 갈 데가 있다
사막에 널린 게 집이지만
성장이 멈추지 않는 붉은 캥거루는
사막 끝에 있는 자기 집으로만 간다
추위에 얼어붙은
붉은 몸이 들 수 있는 집
든든한 꼬리가 받쳐 주는 집
엄마는 아무리 멀어도 엄마여서
때가 되면 바람도 집에 가고 안개도 집에 간다
세상 모든 것이 집에서 나와 집에 간다 날이 저물면 껑충껑충 뛰어서 가는
붉은 캥거루의 집에는 붉은 캥거루의 붉은 엄마가 있다
마성(魔聲)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손잡고 벼랑에서 뛰어내리자
오래된 보증서와 낡은 라벨이 붙은 올드 바이올린에서 맑고 가는 애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독에 갇혀 말간 물이 된 어린 남자아이의 긴 신음소리 같았다, 뒷배가 불룩한 몸통 속에서 가물가물 흘러나오는 마른 손가락과 긴 팔의 색감 감치는 소리
물의 입자를 가진 세상의 소리들은 가문비나무로 흘러 올랐다
가파른 등고선을 넘는 물의 행군에는 자주 낙오자가 나오지만
고난을 이겨낸 소수의 맑고 낮은 소리들은 고산지의 체관부에 당도하여 삭풍을 몰아쉬었다
소리의 모천인 거기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바위 속으로 뿌리를 벋는 가문비나무는 사막을 걷는 수도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모여 사는 숲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원이어서
소리의 입자들은 바람의 수도원에서 맨 처음 태어났다는 창조설 앞에서
연주자들은 옷깃을 여미며 경건해진다
눈물을 조율하여 시냇물 소리를 낸다는 하얀 곱슬머리 연주자를 안다
거룩한 제의에는 맨 처음의 검은 빛 울림을 바쳤다는 제사장을 안다
살아서 오백 년 죽어서 천 년을 부딪쳐야 소리가 트인다는
가문비나무에서 나와
죽음으로 인도하는 부드럽고 우아한 유혹의 소리를
밤을 새워 다듬던 중세의 장인
소리의 씨앗은 탄생과 죽음의 배아를 품고 있다고, 수도사는 검은 옷 아래 남몰래 거두어 숨겨서 갔다, 와서 부딪치는 소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력이 더 커지는 것이어서, 충만하는 소리는 날개가 돋아야 어둠의 양력이 생기는 것이어서, 마법의 줄에 매여 울타리를 넘은 연주자의 목에는 붉은 스카프가 매여 있었다
나뭇결을 휘어잡은 수질선이 음질을 닦는다
귀가 트이듯 소리도 트여야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음향판은 수명이 끝날 때까지 소리를 다듬는다
가문비나무의 낮은 속삭임은 수명이 끝나기 직전에 내는 딱 한 번의 소리여서
부드럽고 따뜻하고 색감 감치는 물살 같은 노래여서
천 년에 한 번씩 애기 소리를 내는
올드 바이올린이 그를 굽이굽이 벼랑 끝으로 데리고 간다
랜선 하이파이브*
하이~
까치집 같은 한동네에서 두 사람이 손바닥을 마주칠 때
당신은 양각 나는 음각 두 개의 도장이 다가와 서로에게 서로를 찍으면 맞춤 같이 찰진 소리가 났지
착~
맞아 떨어지던 한때의 따뜻함
하이~
이 나무 저 나무 우듬지의 서로 다른 까치집으로 멀어져서
이제 우리는 손바닥을 부딪는 흉내만 낸다
소리는 없고 동작만 있는 무성영화처럼
두 개의 발굽에 허공을 끼워 출렁출렁 줄을 타는 줄광대는 숲의 끝에서 오는 바람의 몸짓으로 흔들린다
바람은 먼 곳의 따뜻한 아랫목을 실어 오지 못하지
부딪칠 수 없어 체온이 사라진
수족냉증을 앓는 자의 조상은 파충류였을 것이다
어둠의 몸이 가장 두터워지는 동트기 전의 쟁반형 안테나는 은밀한 전파를 우주로 쏘고 가는 전파와 오는 전파가 부딪쳐 비밀의 문이 열리면 무한궤도는 모천으로 회귀하는데
교도소의 접견실처럼 투명한 칸막이가
손바닥으로 오가던 속 깊은 따뜻함을 얼음인 양 가로막고 있다
착~
도장 찍는 소리가 사라졌다
원시 지구에 두고 온 찰진 체온의 기억이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뜬다
* LAN線 High Five : 온라인상으로 두 사람이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마주치는 일
비추(悲秋)
바람이 분다
나무가 흔들린다
다 떠나고 혼자 남은 가지 끝의 나뭇잎이
허공을 붙들고 떤다
미간을 찌푸린 채 단풍나무 아래로 내려앉은 하늘
빗방울 떨어지고
낮아지는 숲의
성긴 옷자락 아래로 소슬바람이 흐른다
한기는 왜 또 몸 깊이 스며드는지
흔들리는 까치집 아래 놓아둔
베이비 박스 바깥 어린 생명은 죽어가고
바람 자락 사이로 흐르는 휘파람 소리가 차다
우산을 받치고 가는 길 끝의 사람이여
푸른 날개 펄럭이며 예까지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멀리 왔는데
안개에 젖은 낙엽의 길목을 당신은 홀로 돌아서 간다
몇 장면의 연극이 끝나 버린 후
마지막 조명마저 꺼져가는 무대는
절망의 동굴처럼 밤의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까치집이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리고
빗방울 날리며 바람이 분다
투명한 비닐우산 아래
굽 높이 세우고 걸어가는 젖은 물새의 머리꽁지에
차가워진 빗방울이 쓸쓸하게 매달려 있다
빗방울에 어른거리는 맑은 돋을새김의
구겨진 나무가 온몸으로 젖고 있다
우비*
1.
네 척의 배가 심해의 검색창 속으로 들어갔다 배보다 더 큰 몸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기조업을 하던 선원들의 출항이 사라졌다 기항지에 갇힌 그들은 사료를 먹으며 비만이 되어 갔고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꽃무늬 마블링이 들어섰다 희미해지는 배의 기억 망망대해를 뚜벅뚜벅 걸어가던 네 척 배의 성스러운 노동 이야기가 아득한 전설로 사라지던 날 만선으로 귀항하던 먼 바다의 푸른 파도가 꿈속에서 넘실거렸다 바다를 쓰다듬으며 해류 속의 고기를 낚아 올리던 배 궁핍과 고난과 헌신을 실었던 배 네 척의 배가 침몰한 바다에 커다란 바퀴의 트랙터가 소의 등허리 같은 밭이랑을 돋우고 있다
2.
맨발로 언덕을 올라간 그분이 있어
상한 발아래 무릎을 꿇습니다
당신의 맨발이 버텨야 할 내일이 몸보다 무거워
굽이 자라지 않는 발을 씻기며
지난 연안을 닦아 냅니다
3.
멀리 가는 길
상하기 전의 성한 발에
오늘은
두 켤레의 짚신을 감발하듯 신깁니다
* 우비(牛屝) : 소에게 일을 시킬 때에 신기는 짚신
[심사평] 수상자_김인숙 시인
“비약적 발성과 상상력과 언어 기획”
많은 응모자 가운데, 김인숙 시인의 「집에 간다」를 석정촛불시문학상 수상작으로 뽑았다. 그의 비약적 발성과 상상력과 언어 기획을 높이 샀다. 우선 첫 행에 붉은 캥거루로 진술이 시작되는 사막 끝 이국의 서경이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다. “집도 집에 간다”는 문장을 읽으면서는 캥거루의 몸에 새끼를 담아 키우는 육아낭이 또 한 채의 집으로 연상되었다.
집과 집의 동행이 어미와 새끼의 동행을 상상하게 했다. 또 시행을 따라가다 ‘집’이 반복되면서 어떤 운율을 느끼게 했다. 요즘 시가 잃어버린 음악성을 복원시켜 새로운 시의 맛을 주고 있는 시였다. 시인의 주도면밀한, 전략적 어휘 구사가 눈에 띄는 시다.
아이와 엄마가 맞이하는 “엄마도 나도/집은 비를 맞아도 집이다/비가 새도 집이다”라는 공동운명체,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추위에 얼어붙은/붉은 몸이 들 수 있는 집/든든한 꼬리가 받쳐 주는 집”은 정신적 위안처로서 집의 형상이다. 시의 후미에서 캥거루가 집에 가는 행위는 바람과 안개로 확장된다. 시가 진술되는 내내 집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있다.
시인이 응모한 다른 시의 방법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수상을 축하하고 발전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신달자(위원장), 유자효, 김주완, 정군수, 공광규(글)
[수상 소감]
붉은 캥거루가 집으로 갑니다, 집에는 엄마가 있고 엄마 속에 집이 있고 없는 집에도 엄마는 있습니다. 엄마는 시의 원천이자 자양분입니다. 안식하는 거처이자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시에 대한 저의 욕심은 붉은 캥거루의 몸처럼 최대종입니다. 그러나 저의 시는 늘 허약하고 작아서 어미 캥거루와 같은 탄력과 관성을 동경합니다. 이제 순수 서정시의 본령이자 고결한 인품의 표상이신 석정 선생님의 시 세계를 또 하나의 집으로 삼아 탄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붉은 캥거루의 도정을 예쁘게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산책하는 팔거천의 왜가리는 낮 동안 물가에서 지내다가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큰 날개를 활짝 펴고 근처의 숲으로 하얗게 모여듭니다. 하늘 맑은 계절이 오는데 저는 또 엄마 같은 집으로, 집 같은 엄마인 시의 숲으로 가면서 마음껏 행복하겠습니다.
[김인숙 시인 약력]
경북 고령 출생(대구 거주).
2010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 『꼬리』, 『소금을 꾸러 갔다』,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신라문학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농어촌문학상 대상, 경북작가상, 경상북도문학상 수상.
시비건립(예천곤충나라사과테마파크)
경북문협 사무국장, 부회장 역임
구상문학관 <언령> 지도교수
[시상식]
2021.09.25.(토)15:00
전북 부안 석정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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