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자유주의/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대구일보-[특집]대구·경북 현대 인물탐구 75-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2019.01.22. 13면)

김주완 2019. 1. 22. 12:00

[그의 삶 그의 꿈]

현대사 최전선에서 한국적 ‘자주인 사상’ 자율공동체 꿈꾸다

<75>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

2019.01.21

하기락은 한국적 아나키즘을 꿈꿨고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웠다.<br> 사재 대부분을 사회운동에 사용, 평생 가난했지만 멋을 아는 신사였다.<br> 베레모를 쓴 82세의 하기락. 베레모와 조끼, 지팡이, 가방 등은 그의 상징이었다.<br>
하기락은 한국적 아나키즘을 꿈꿨고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웠다.
사재 대부분을 사회운동에 사용, 평생 가난했지만 멋을 아는 신사였다.
베레모를 쓴 82세의 하기락. 베레모와 조끼, 지팡이, 가방 등은 그의 상징이었다.

1967년 9월 추석날 대구 삼덕동 집에 하기락 교수 가족들이 모였다.<br> 하기락은 부인 최재전과 사이에 8남 1녀를 두었다.<br> 사진에는 외동딸을 제외한 하 교수 부부와 아들 8형제, 손자•손녀들이 모두 담겼다.<br> 부인 최재전은 다음 해 봄 췌장암으로 숨졌고, 하기락은 이후 재혼, 딸 2명을 더 뒀다.<br>
1967년 9월 추석날 대구 삼덕동 집에 하기락 교수 가족들이 모였다.
하기락은 부인 최재전과 사이에 8남 1녀를 두었다.
사진에는 외동딸을 제외한 하 교수 부부와 아들 8형제, 손자•손녀들이 모두 담겼다.
부인 최재전은 다음 해 봄 췌장암으로 숨졌고, 하기락은 이후 재혼, 딸 2명을 더 뒀다.

그는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광복을, 광복 후에는 사회혁명을 위한 전사였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를 생각했다.
한국적 아나키즘 세상, 그가 꿈꾸고 실천한 나라였다.

◆반골의 땅 ‘안의’의 수재 소년

하기락은 한일합병 3년째인 1912년 1월26일 경남 함양 안의면 초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경출과 어머니 신거부의 3남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태백산맥 줄기 산골 마을 안의는 조선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지역 출신 정희랑이 끼었다는 이유로 백 년 이상 벼슬길이 막힌 곳이었다.
안의는 숱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는 이유로 일제가 군에서 면으로 폐 군까지 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성지였다.
그는 뼛속 깊이 반항 기질을 가진 ‘안의’ 출신이다.

가난했던 아버지는 하기락 출생 후 놋그릇 공장을 운영해 재산을 일궜다.
그는 눈빛 강렬한 아들을 서당에 보냈다.
5년여 서당에 다니던 하기락은 열 살 되던 해 아버지 결단으로 땋은 머리를 깎고 안의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소년 하기락은 6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 박영환(후일 아나키스트 시인) 등과 연극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공연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분노한 하기락은 “석유로 경찰서를 불태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박영환이 말려 경찰서 공격은 성사되지 않았다.

영특한 하기락은 월반해 5년 만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수재들이 다니던 경성 제2고보(5년제ㆍ현 경복고)에 합격했다.
육촌 형과 하숙하던 그는 촛불 켜고 공부해 전체 수석을 놓지 않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이 경성까지 번졌다.
3학년인 그는 중동학교 학생 양일동(후일 민주통일당 당수) 등과 시위를 주동하여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는 이후 경성의 중앙고보 2학년에 편입, 1933년 졸업했다.

그는 중앙고보 시절 일본 아나키스트 기관지 흑기(黑旗)를 학생모임에 보급하며 아나키스트 길로 들어선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22살 때인 1934년 이웃 산청 출신 처녀 최재전과 선을 보고 결혼했다.
아내는 16세였다.


◆일본유학 시절 아나키스트 활동

1935년 그는 신혼의 아내를 고향에 두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동경 상지대 예과에 입학한 그는 2년 공부 후 와세다대 철학과로 옮겼다.

당시 그는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빠져 있었다.
유학시절 그는 고물장사를 하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유학생들과 아나키즘 선전 활동을 했다.

1939년 12월 졸업생 송년회에서 일제 창씨개명 정책을 비판하다 동경 경시청에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국내에 소개된 아나키즘은 민족주의ㆍ공산주의와 함께 3대 독립운동 이념의 하나였다.

신채호, 이회영, 박열 등 쟁쟁한 인물들이 속해 있던 아나키즘 계열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추진, 일제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6년 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그는 황해도 재령의 재령상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나키스트 전력이 드러나 쫓겨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분뇨통을 지고 농사지으며 아나키즘 운동의 일환으로 농민조합을 창설, 조합운동을 했다.


◆광복과 한국적 아나키즘 시도
1946년 4월20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 용추사에서 한국 아나키스트 대표들이 모여 3박 4일 간 조국의 앞날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br>
1946년 4월20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 용추사에서 한국 아나키스트 대표들이 모여 3박 4일 간 조국의 앞날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1945년 광복이 됐다.
조국은 좌우 대립으로 혼란의 극치를 이뤘다.
하기락은 그 틈에서 아나키즘을 광복 조국의 이념으로 추진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우파 민족주의보다 좌파 공산주의와 대립이 더 심했다.
부산 언론계를 건국준비위원회 계열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자 민족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연합을 제의했다.

1946년 2월 아나키스트들은 우파 조직을 모체로 부산에서 ‘자유민보’라는 일간지를 창간, 공산 계열과 이념논쟁을 펼쳤다.
편집은 하기락이 맡았다.
하기락은 아나키스트 기관지 ‘자유연합’을 2년간 발행하기도 했다.

1946년 4월20일부터 4일 간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 용추사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하기락 등 안의 출신 아나키스트들이 주관했다.
참석자들은 노동자ㆍ농민의 조직된 힘을 새 정부 수립에 반영할 정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통상의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ㆍ정부ㆍ정당을 부정한다.
그러나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새 국가 건설을 위해 창당을 결정한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대회 결의를 토대로 1946년 7월 서울 필동 역경원에서 독립노농당을 결성했다.
독립노농당은 민주입헌정치 실시, 중소 자산 층 주체 계획경제 시행, 경작자만의 토지 소유권 향유 등 정책을 발표했다.

하기락은 당 기관지 독립노동신문 편집을 맡았다.
그러나 독립노농당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를 기점으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전쟁을 부른다는 이유로 선거참여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당원들이 당명을 어기고 출마, 당선되자 당은 선거참여자 전원을 제명하는 등 지나치게 이상주의만 추구했다.
결국, 독립노농당은 5ㆍ16 군사쿠데타 후 정당해체 조치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교수직은 생업, 사회혁명은 주업

부산에서 활동하던 하기락은 1947년 활동무대를 대구로 옮긴다.
옛 대구대(현 영남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

그는 당시 교육사업에도 열성이었다.
그는 1946년 고향 안의에서 아나키스트 이진언씨가 안의중학교를 설립할 때 힘을 보탰고, 1951년에는 아예 집안 재산을 모두 들여 안의고교를 설립했다.
두 학교 모두 아나키즘이 설립이념이었다.

1950년 6ㆍ25 전쟁이 터졌다.
하기락은 대구에 머물렀다.
그는 1953년 경북대가 개교하자 경북대 철학과로 자리를 옮긴다.
하기락은 교수직은 생업이지만 사회혁명은 주업으로 생각했다.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그는 1960년 4ㆍ19혁명 때 교수시위를 주도했다.

교수로서 하기락은 학문연구에도 뛰어났다.
유학시절 실존주의에 빠졌던 하기락은 광복 후에는 독일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하르트만 연구로 1964년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63년 지방 철학자 모임인 한국칸트학회 설립을 주도, 후일 서울 기반 한국철학회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대한철학회로 발전시켰다.

그는 1968년 경북대 교수직을 사임했다.
장남 영석이 경북대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자 아들과 한 학과에 있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정식 교수로 임용되지 못한 채 어렵게 지내야 했다.

1973년 그는 잠시 정치에 참여하는 외도를 한다.
아나키스트 동지 양일동이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자 정책위의장을 맡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제2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자주인 사상

하기락은 아나키즘을 ‘자주인 사상’으로 불렀다.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은 일본 강점기에 잘못된 것이라며 쓰지 않았다.

그는 국가ㆍ정부 등 권력의 속성이 있는 것들은 부정하지만 최소한 공동체(코뮌)를 이끌 자율기구는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인간들이 국가주의 억압, 자본주의 착취, 생존경쟁에 따른 폭력에서 벗어나 자율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그렸다.

그는 모든 혁명이 지배세력만 교체하는 데 그쳤다며 지식층 주도 운동이나 무산자 계급 독재를 비판하고 민중 직접 행동을 주장했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지나치게 이상사회를 그렸을지 모르지만 실존하는 권력과 폭력을 견제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사상이었다.


◆한국 아나키즘의 길
1988년 10월 하기락은 세계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다.<br>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세미나’라는 이름의 이 대회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서울에서 열려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br> 대회 참석자들과 함께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은 하 교수(오른쪽 네번째).
1988년 10월 하기락은 세계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다.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세미나’라는 이름의 이 대회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서울에서 열려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회 참석자들과 함께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은 하 교수(오른쪽 네번째).

70년대 독재정권 시절을 어렵게 지내던 하기락은 1980년 10월 계명대 철학과 교수들과 ‘목요철학인문포럼’을 만들어 철학의 대중화에 힘썼다.
매주 목요일 시민들과 철학을 논의하는 이 모임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그는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 1988년 10월 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를 열었다.
그는 경비 상당 부분을 사재로 충당했다.
세계 1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이 대회는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급진 개혁주의자 모임이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기락은 이후에도 한국 아나키즘을 해외에 알리는 일을 펼쳤다.
한국 아나키즘은 일본강점기에선 테러리즘으로, 광복 후 우익에게는 공산주의 4촌으로, 좌익에게는 사이비 혁명주의로 매도ㆍ왜곡됐다.

그러나 자유 없는 공산주의가 몰락의 길을 걷고, 불평등한 자본주의가 모순이 심화하고 있는 지금, 아나키즘은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도 있게 됐다.
불의에 항거하며 자유를 갈망하는 심리는 정도는 다르지만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이다.

한국 사회가 좌우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좌초하지 않는 이유는 진영과 관계없이 잘못된 점을 용서치 않는 아나키스트 성향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사상·행동 일치한 지식인
2002년 6월 고향 안의면 안의공원에서 동료ㆍ후학 130명이 참가한 가운데 학덕비 제막식이 열렸다.<br> 학덕비에는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라는 제자 김주완 교수(경산대)가 스승 하기락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br> 사진은 하 교수의 4남 하영선(전 대구대 식품공학과 교수) 부부.
2002년 6월 고향 안의면 안의공원에서 동료ㆍ후학 130명이 참가한 가운데 학덕비 제막식이 열렸다.
학덕비에는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라는 제자 김주완 교수(경산대)가 스승 하기락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은 하 교수의 4남 하영선(전 대구대 식품공학과 교수) 부부.
하기락은 영어ㆍ일어ㆍ독일어ㆍ한문에 능통했다.
그는 1980년대 경북대 대학원 과정에 개설된 동양철학 강좌에서 한문 원문으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근사록’ 등을 강의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 읽기 모임을 만들어 정확한 번역과 해설로 후학들의 이해를 도왔다.

그는 80세 때인 1992년 ‘조선철학사’를 발간했다.
서양철학자인 그가 한국역사를 1만 년까지 끌어올려 상고시대부터 근세까지 철학을 기(氣)의 관점에서 풀어쓴 것이다.

1997년 2월3일 그는 대구 만촌동 집을 나서다 쓰러졌다.
국제평화협회지 ‘평협’을 돌리려 집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그는 경북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그는 언제나 약자 편이었다.
누구에게나 겸손했고, 평생을 청빈했다.
광복 후 한국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있었다.
그는 한국 현대철학 1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였으나 학술원 회원도 되지 못했고 훈장이나 상조차 받은 적이 없다.
늘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후학들은 그를 전설처럼 말하고 있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

• 1912년 1월26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
• 1922년 안의공립보통학교 입학
• 1927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입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시위 주동으로 퇴학
• 1934년 최재전과 결혼
• 1935년 일본 밀항/일본 동경 상지대 예과 입학
• 1937년 와세다대 철학과 입학
• 1939년 12월 창씨개명 비판, 3개월 구류처분
• 1941년 대학 졸업/황해도 재령상고 교사
• 1946년 부산 ‘자유민보’ 주필
• 1946년 4월 안의 전국아나키스트대회 개최
• 1947~52년 옛 대구대 교수
• 1951년 안의고교 설립
• 1952~68년 2월 경북대 철학과 교수
• 1963년 한국칸트학회 설립 주도
• 1973년 민주통일당 정책위의장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 1987년 제3회 전국아나키스트대회 대회장
• 1988년 서울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
• 1992년 12월 조선철학사 발간
• 1997년 2월3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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