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2시집 어머니[1988]

처음이며 끝인 어머니 / 김주완

김주완 2011. 3. 11. 18:44


[제2시집『어머니』(1988)]


   처음이며 끝인 어머니 / 김주완



          1


탯줄의 다디단 영양을 빨며

고물고물한 생명이 되어가던 때

처음으로 내가 한

발길질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추운 세상바람에

언뜻언뜻 연한 살갗을 맡긴 채

파고들던 품속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유쾌했을 따뜻함이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벌써 이만큼 달려온 지금

당초의 출발점에서 내가 한

배냇짓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크고 맑은 그 때의 심장소리가

내 가슴에 아직 뛰고 있는 한

어머니는 나의 처음입니다.

어머니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고

내 배고픔이 어머니의 배고픔이 되는 한

우리는 서로 작별할 수 없습니다.

죽음 같은 영이별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합니다.

죽음은 단순한 멈춤일 뿐

송두리째 돌이켜서 행하는

말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멈춘 것은 다시 움직이고

생겨난 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살아감이 시간 위에서라면

내게 있어

어머니는 시간이며,

살아감이 언제나 뒤늦은 후회라면

내게 있어

어머니는 뉘우침이며,

살아감이 어디엔가의 기댐이라면

내게 있어

어머니는 언덕이며,

살아감이 늘 새로운 바램이라면

내게 있어 어머니는

푸르디푸른 한 자락 꿈입니다.

생명의 원천인 밥 같이

활동의 근본인 물 같이

감싸여 부딪치는 옷 같이

들어가 안주하는 집 같이

어머니는 하나이며 모두입니다.

힘든 겨룸에 나서는

벌거벗은 내 기도가 어머니이며,

한 날 한 시 오롯한 어머니의

정성의 중심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어머니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이며

깊고 깊이 그 속에 박힌 처음의

황금빛 영롱한 핵입니다.


          2


뒤란을 돌아가면 거기

어머니가 있네.

굴뚝대 뒤켠에도 장독대에도

어머니가 있네.

남새밭 굵어가는 배추속대에도

하얗게 피어나는 파종다리 근처에도

젊은 어머니가 있네.

잔잔한 어머니의 웃음이

보오얀 목련으로 벙글고 있네.

도회 변두리로 옮겨 와

새장 같은 집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도

따라와 옛날 그대로의

어머니는 걱정을 베풀고 있네.

눈 오는 날은 눈이 오는 대로

비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

어머니는 사방에 있네.

사방에서 지켜보며

소곤소곤 달래고 있네.

범어동 빈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네.

아곡동 산 속에도 있고

밖에도 있네.

사진 속에도 사진 밖에도

어머니의 소리가 있네.

안에 있는 어머니와 밖에 있는 어머니가

늘 같은 어머니로 있네.

누님 집에 가도, 동이 용이 집에 가도

거기

한 어머니가 있네.

돌아보면, 

형님의 근엄 뒤에도

누님의 자애 속에도

동이 용이의

잔정 밑에도 어머니의 마음이 있네.

그 아래 아이들 속에도

어머니가 있네.

그 아래, 그 아래, 그 아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속에도

어머니가 있네.

훠이훠이 달려오는

키 큰 어머니가 있네.

철 이르게 받는 냉잇국에도

늦가을 눈이 매운 김장김치에도

벌겋게 무친 무 생나물에도

손 꺼풀 거친 어머니가 있네.

마른 나무에 피는 꽃처럼 늙은

어머니의 오목한 웃음이 있네.

어머니가 있네.


          3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소나무를 떠나 어디론가 솔씨가 날아가듯

어머니를 떠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짐을 지고 가는 게 아니라

짐에 눌려 끌려서 가는

가파른 이승의 오르막길을

언제부터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남이 되어 올라가고 있는가,


어머니!

우리를 떨치고 떠나간

어머니는, 저승강 언덕 어디에서

이를 만나고 있을까,

허허허 모든 것을 벗어나

혼자는 편하되 어머니의 한이 되던

이승에서 박힌 못을 치마폭에 싸안아

뽑고 있을까,

어머니를 만난 홍이는

선들선들 웃고 있을까,


성주행 버스에 오르며 버린

형님의 이데아idea

완석정자 처마 끝에서

지금은 꽃이 되고 있을까,

혼례날을 기다리던 과년한 누님은

가난의 죄로 먼저 떠난

꿈마다 설운 어머니의 손가락을 안고

한밤을 적시고 있었을까,

산을 오르며 억새풀에 베이는

고압전선의 헝클어진 울음으로

어린 우리는, 쓰디쓴 참패의

시간에 굴복하고 있었을까,

존재의 시커먼 절벽 앞에서

녹아가는 얼음 한 점 붙들고

우리는

모두 간구하고 있었을까,


떠돌이 날개를 간추리고

어디엔가 안주하고 싶은

아버지,

짙은 물빛으로 묻어나는 수하의

효성을 콸콸 자랑하고 싶은

아버지는

넓이도 깊이도 같은

이끼 낀 말벗의 어머니가 그리울까,

어머니의 인고가 그리울까,


ㅡ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돌아간다,

모든 것의 끝이자

또한 우리의 처음인 어머니에게로,

지금의 멈춤으로부터 다음의 운동으로.



'제1~7 시집 수록 시편 > 제2시집 어머니[1988]'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머리 1 / 김주완   (0) 2011.03.11
끝머리 2 ㅡ 저문 산길에서 / 김주완   (0) 2011.03.11
내 곁의 어머니 / 김주완   (0) 2011.03.11
외길을 / 김주완   (0) 2011.03.11
[후기]  (0) 2011.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