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자유주의/아나키스트 자유주의

김춘수 : [시가 있는 이 한 컷] 미당의 얼굴이 참 젊다

김주완 2002. 6. 4. 10:14

[시가 있는 이 한 컷] 미당의 얼굴이 참 젊다 

 

[출처] 계간 <시인세계>, 2002 겨울 (2), 문학세계사, 2002.11.11.

 

 

계간 시인세계 | 기사입력 2010/03/19 [10:24]

 

(글=김춘수 시인) 1960년 봄 새학기에 나는 마산에 있던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교)에서 대구의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때 문리과대학장이시던 허유虛有 하기락河岐洛 선생께서 주선해주셔서 그렇게 됐다.

하박사는 아나키스트이시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방면의 이론가로서 알려져 있었다. 청마 선생과 친구 사이라서 청마가 그분에게 나를 소개해 주셨다.

대구는 나에게는 생소한 고장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몹시 외로웠다. 그러나 차츰 내 주위에 친구가 모이게 됐다. 시조시인 이호우 씨를 위시하여 박훈산, 신동집, 박양균, 박주일, 전상열 그리고 비평가이자 영문학자인 전대웅 제씨다. 거의 매일같이 우리는 주점에서 또는 다방에서 만나곤 했다. 나는 술이 약하지만 친구가 좋아 늘 어울리곤 했다. 주량으론 박훈산 씨가 단연 으뜸이었고 술을 좋아하기는 박주일 씨가 으뜸이었다. 박주일 씨는 술은 인생을 두 배로 살게 해준다고 늘 술을 예찬하곤 했다. 단골로 나가는 왜식집이 따로 있어 거기서 왜주를 즐기곤 했다. 나도 간혹 대접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경주까지 원정을 가서 그쪽 친구들을 괴롭히곤 했다.

여기 소개하는 이 사진은 내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에 부임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고 기억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어우러지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달성공원에 있는 상화시비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면 박훈산 씨의 안내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박훈산 씨는 대구의 오랜 거주인이고 대구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맨 좌편에 있는 분은 극작가 이광래 씨인데 이분과 미당과 박용구 씨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대구에서 무슨 (문학의) 행사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이란 때로 참 묘미가 있다.

낡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이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나의 사십대 초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어 새삼 스쳐간 세월이 돌이켜진다. 미당의 얼굴이 참 너무 젊다. 그러나 지금은 이승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박훈산 씨도 그렇다. 그 훤칠한 키가 눈앞에 선하다. 박용구 씨는 소설을 쓰지 않게 된 지도 오래고 소식조차 묘연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그대로 두지 않는다.
 
이 무렵에 있었던 미당에 관한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있다. 영남대학교의 초청으로 미당이 문학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중 미당은 느닷없이 자리를 떴다. 청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미당이 다시 무대에 나타났다. 나타나서는 하는 소리가 ‘생리문제라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강연 전에 맥주를 좀 과도히 마셨는 듯했다. 사전에 화장실을 다녀올 것이지 이런 따위 행장은 참으로 뜻밖이다. 기상천외라고 할 수 있다. 미당 아니고는 흉내도 내지 못할 짓이다.(짓거리다.)

청중은 와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청중은 별로 무시당했다는 기색들이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은 미당의 천진스런 자태 때문이기도 했다. 그 뒤에도 나는 가끔 이런 의표를 찌르는 미당의 행동거지를 보게 됐다.
 
본 기사는 계간 시인세계에 실렸던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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