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언어 : M.하이데거와 N.하르트만의 존재론적 해명
김 주 완(시인/철학박사)
<현장 배부용>
시란 무엇인가? |
○ 해답을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본고 결론에서 나오는 말>
사람들은 <자식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자식을 잘 만들고 잘 키운다.
시인들은 <시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시를 잘 쓴다.
모든 예술가들이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예술창작을 잘 한다.
善琴奕者不視譜(선금혁자불시보) (淸 魏源 <默고>)
거문고나 바둑에 뛰어난 이는 악보나 기보에 매달리지 않는다.
시, 음악, 美에 대한 동양적 정의 |
○ 不學詩 無以言(불학시 무이언)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답게) 말할 것이 없다
不學禮 無以立(불학례 무이립)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
( 論語 <계씨편>)
○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예 성어악) (論語 卷8 泰伯-8)
시로써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고 예로써 인격을 세우며 음악으로 완성된다
○ 爲之楽, 以宣其湮鬱(위지악, 이선기인울) (장재,《정몽》<중정>)
(성인이 나신 이후) 음악을 만들어서 막히고 답답한 가슴을 뚫리게 해 주었다
○ 充內形外之謂美(충내형외지위미) (장재,《정몽》<중정>)
미는 안이 충만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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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書不盡言 言不盡意(서부진언 언부진의) (주역 계사전)
글로써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써 생각(뜻)을 다하지 못한다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 (시경(詩經) 〈모시 서(毛詩序)〉)
(시자 지지소지야 재심위지 발언위시)
시란 뜻이 가는 곳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4.2)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論語 양화 9)
(시 가이흥 가이관 가이군 가이원)
시를 배우면 흥겨울 수 있고, 보는 것이 가능하며, 무리 짓는 것이 가능하고,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 가능하다.
1. 들어가는 말
1.1. ‘시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시의 본질 또는 시의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시인 구 상 교수는 시를 정의하기가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우리는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라고 한 엘리어트(T. S. Eliot, 1888-1965)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는 타당하고 후자는 부당하다. 전자가 타당하다는 것은 시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일면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즉 단적 총체적으로 시를 정의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이고, 후자가 부당하다는 것은 시에 대한 정의가 비록 완전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정의 모두가 오류일 수만은 없다는 점에서이다. 왜냐하면 일면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오류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에 대한 정의를 하기가 어렵다는 구 상 교수의 주장은 타당하지만,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를 오류의 역사라고 하는 엘리어트의 진술은 부당하다고 하겠다.
시의 본질을 묻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의 본질 규정은 단일 원리에 의하여 단적으로 말해져야만 한다는 암묵적 요청이 거기에 전제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설명에 있어서 이러한 단일 원리에의 요청을 하르트만은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경향의 형이상학적 잔재이다. 하르트만은 『정신적 존재의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원리의 다수성 앞에서는 그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겁을 낸다. (⋯ ⋯) ‘단일원리’에서의 설명이 최선의 설명이고, 단순성이 진리의 표지라고 하는 견해는 케케묵은 선입견이다.
그러니까 복잡한 형태를 일면적·일원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의 경향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시는 그것이 바로 무엇이라고 단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복잡한 형태라고 보았을 때, 시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은 원리의 다수성에 의존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할 때 비로소 시의 본질에 대한 해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1.2.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근원적으로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시는 부정 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경험적·현실적 존재가 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의 본질 규명은 존재론적 탐색으로 가능하여 진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현대 서양철학에 있어서 존재론은 하이데거와 하르트만으로 대표된다. “두 사람은 모두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관한 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의를 한결같이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하르트만은 이 전통을 충실하게 수용하였고, 하이데거는 이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할 수 있다. 하르트만의 존재론은 ‘신 비판적 존재론’ (neue kritische Ontologie)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기초 존재론’ (Funddamentalontologie)로 특징화된다. 하르트만은 ‘자체존재’의 문제를, 하이데거는 존재의미를 묻는 존재론, 즉 ‘존재이해’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예술철학에 대한 두 사람의 이론은, 하르트만이 예술과 예술작품이라는 존재 자체를 해명하는 ‘대상분석’의 입장에 철저하게 서 있다고 한다면 하이데거는 예술적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해석학적 입장, 즉 넓게 보았을 때의 ‘작용분석’의 입장에 서 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이론적 차이성에 대한 연구는 비록 그 실적이 많지는 않을 망정 또한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하기락 교수, 로츠, 스탈마허등의 연구업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하르트만과 하이데거의 이론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나 유사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바로 여기에 이 글의 목적이 위치한다. 물론 그들의 철학이론 전반에 대한 비교분석에서 유사성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지극히 제한된 분야와 범위 내에서 유사성을 추출하고자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각각 독특하게 서로 다른 두 이론체계에서 그것도 기성연구의 지층이 결코 두텁지 못한 토대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시도는 자칫 객관적이지도 못하고 엄밀하지도 못하게 흘러갈 위험부담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구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하르트만과 하이데거 두 사람 공히 이론체계의 토대가 존재론이라는 점과 1922년에서부터 수년동안 두 사람이 같이 마르부르그(Marburg) 대학에 재직하였고 많은 토론을 나누었다는 점에 의거하여서이다. 따라서 이 글은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 사이의 유사점을 찾는데 중점이 놓여진다. 그러나 유사성과 연관되는 차이성에 대한 언급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최소한으로 한정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글의 전개에 있어 ‘신 비판적 존재론’과 ‘기초 존재론’ 이라는 두 사람의 입장을 완전히 벗어날 수(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없는 한, 이 글이 형이상학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 또한 이 글의 한계가 된다. 왜냐하면 “입장(Standpunkt)이란 어느 것이나 다 그것이 입장인 이상 벌써 형이상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부정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1.3. ‘시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이 해명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본질해명이 선결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바, 시 없는 언어는 생각할 수 있으되 언어 없는 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書不盡言 言不盡意(서부진언 언부진의) (주역 계사전) 글로써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써 생각(뜻)을 다하지 못한다 ○ 인간은 언어로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세계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이다.(그가 아는 언어만큼 생각할 수 있다) (학교 공부) = 언어(말) 공부 ○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04. 26 ~ 1951.04.29.) 전기 이론 = 그림 이론 후기 이론 = 쓰임 이론 ○ 마음속에 있는 뜻이 말로 나타나는 것이 詩이다. 「시란 뜻이 가는 곳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면 이것이 말로 표현되는데,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면 탄식하게 되고, 탄식으로도 부족하면 길게 노래하게 된다.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흔들고 발로 땅을 구르며 춤을 추게 된다.(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 情動於中而形於言, 言之不足, 故嗟嘆之, 嗟嘆之不足, 故詠歌之. 詠歌之不足, 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시경(詩經) 〈모시 서(毛詩序)〉》) |
하르트만은 시의 질료를 언어라고 하고 하이데거는 “시는 그 작품을 언어의 영역에서 언어를 ‘질료’로 하여 창작한다”고 함으로써 시의 언어의 불가분성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는 일치한다. 따라서 “시의 활동영역은 언어”이며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하이데거의 명제는 이 글의 출발점이 된다.
‘언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존재의 집’으로, 하르트만에 있어서는 ‘의미의 의상’으로 규정된다.
2. 언어; ‘존재의 집’과 ‘의미의 의상’
2.1.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명제로 압축된다. ‘언어’와 ‘존재’는 하이데거 존재론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 철학의 주제는 전기에 있어서는 ‘존재’, 후기에 있어서는 ‘언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존재이해의 방법적 통로를 후기 하이데거는 ‘언어’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여 언어는 존재이해의 방법적 통로가 되는가? 이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는 ‘존재자는 어떻게 하여 존재자로서 우리에게 알려지는가’라는 문제제기에 놓여 있다. “이미 존재하는 자는 말을 통해서 ⋯ 존재자로 된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존재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아직 있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서 사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존재(Sein)하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현존(Anwesen)하도록 하고, 존재자로서의 어떤 것이 나타나도록 하며” “언어는 현존하고 있는 것(Anwesende)을 처음으로 그것이 현전(Anwesen)하도록 한다.” 그러니까 “현전(Präsenz)이라는 모든 영역은 말할(Sage) 가운데 현존(Gegenwart)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사물로서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언어에 의해서 이며, 언어가 없이는 어떠한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언어의 본질은 명명(命名, Nennen)으로 된다. 이리하여 “명명된 것의 본질은 언어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것을 명명함으로써 언어는 본질을 비본질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명명된 언어는 만인의 공동재산이 된다. 그것은 상호소통의 수단으로서 사물을 이해시키는데 소용이 되며 유용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언어를 단순한 상호소통의 수단, 즉 사용수단으로만 규정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한갓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존재자의 한복판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언어가 비로소 주는 것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인간이 자의로 처리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최고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생기(生起, Ereignis)이다.” 따라서 “언어는 세계를 움직이는 진술로서 모든 관계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는 말의 본질은 말함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본래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하이데거에게는 진술에 일치함이고 사건에 일치함인 것이다.” 또한 “말이란 이미 존재하는 자를 위해 이름을 제공해 줄뿐만 아니라, 말은 이미 머리 속에 떠오른 현존자를 명명하는 파악일 뿐만은 아니고,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수여해 주는 그것이다.”
현존하는 것은 어떻게 언어를 수여하는가? 그것은 ‘밝게 하기’(Lichtung)에서 가능하여진다. 하이데거의 용어에서 ‘밝게 하기’라는 것은 ‘조명’(照明)이라는 의미로 환언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밝은 전등으로 비추어 밝힘’이다. 조명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우선 조명등과 조명탄을 생각할 수 있다. 조명등은 보통 연극이 공연되는 무대 위의 일정한 배우나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비추어진다. 조명탄은 어둠 속에서 일정한 지역을 잠시동안 살펴 확인하기 위하여 터뜨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명의 본질은 밝힘이고 시선의 집중을 유인함이며 따라서 무엇을 알도록 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은폐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단지 조명된 것(개시된 것)에 대해서만 알게 된다. 물론 조명된 것이라 해서 인간일반이 모두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연극의 관객이 무대 위의 조명된 곳을 향해서 앉아 있더라도 개인적 고민이나 걱정 따위의 골똘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그는 그 순간 조명된 영역을 볼 수 없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지각의 범위는 관심의 범위이다’라고 하는 하르트만의 명제가 여기서는 적절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관심을 가진 것이라고 해서 그 모두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심을 가지더라도 어둠 속에 있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가 없다. 조명되어 있고 그 조명되어 있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 바로 그 때라야만 우리는 그것을 진실로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명과 관심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된다. 그러므로 조명과 관심은 볾과 앎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명은 누군가 비추는 자(관리자)가 있어야만 비추어질 수 있다. 비추는 자는 누구인가? 그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간 또한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그가 비추는 자이라는 걸 알 도리가 없다. 비추는 자도 비추어지므로서 그가 비추는 자라는 걸 우리가 알게 된다. 비추는 자를 비추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비추는 자 자기 자신이어야만 한다. 비추는 자는 또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추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빛이 비치임의 「관리자」로서 빛이 비치임에서부터 밝혀진다.” 여기서 조명과 관심은 같은 것이 된다. 빛이 비치임은 곧 관심인 것이다.
조명과 관심의 일치를 통해서 알게 될 것은 인간에게 있어 곧 사유된 것이다. 사유된 것은 곧 말로 이루어진 표현이다. 그러니까 “사유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빛의 비치임을 경험하는 것이고, 견디어 내는 것이며, 그러한 경험을 언어에서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밝게 하기 -사유- 말(표현)이라는 연관구조로 보았을 때 밝아진 것(존재)은 결국 말속에 위치하게 되므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 되는 것이다. 또한 밝게 함이 고유하게 현상하는 곳이 바로 언어이므로 ‘언어는 존재의 장소’로도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유의 과제는 빛이 비치임을 말로 표현하도록 조력하는 것이고 빛이 비치임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 빛이 비치임의 본질에서 알기 쉽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진리’라는 것은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관계들을 가지고 제기된 ‘밝게 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밝게 하기란 의미에서 ‘비은폐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진리는 존재가 빛이 비치임으로서 스스로를 개방하는 방식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는 명제에 대한 하이데거 자신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언어는 구역(templum = 성역, 신전), 즉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본질은 의미로 다하여지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거나 암호와 같은 것도 아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집을 부단히 통과함(뚫고 지나감; 필자)으로써 존재자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샘에 가고 숲을 통과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이미 ‘샘’이라는 말, ‘숲’이라는 말을 통과하게 된다. -설사 우리가 이 말을 언표하거나 그것이 언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 ⋯) 제 각기의 존재자, 의식의 제 대상과 심정상의 사물들, 자기수행적이고 보다 모험적인 인간들, 이 모든 것들은 제나름의 방식에 좇아서 언어의 구역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존재론에 기초한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한마디로 언어와 존재의 공속관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가 어떻게 경험되는가 하는 것이 언어에서 표현된다고 보는 것이 하이데거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말함(Sage)과 존재(Sein), 언어(Wort)와 사물(Ding)은 베일에 싸인 ⋯ 방식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어는 존재자를 열려진 곳으로 가져 가는 것, 즉 개시성에 대한 하나의 응답인 것이며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개명되는 곳으로 불러내는 명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존재의 궁극적 가능성은 언어일 수밖에 없으며, 비본질적 언어, 형이상학적 언어, 표상적 언어, 일상적 언어 등은 존재의 진리를 가리는 장막, 즉 은폐성을 본질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진리를 나타나게 하는 개방성으로서의 시작(詩作,dichtung)”에 대한 탐색의 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구는 말하여진 말(언어)에 대한 하이데거의 견해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하여진 말이 아닌, 그것의 근원으로서의 ‘언어자체’에 대한 하이데거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이데거는 그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언어자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언어자체가 아닌 ‘말하여진 말’에 대한 해명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지는 않을 망정 언어자체에 대한 하이데거의 언급은 대개 다음과 같은 정도이다. “언어의 본질을 언어로 나타낼 그러한 말하는 행위는 없다. (⋯ ⋯) 언어의 본질적 측면은 언어 가운데로 이르고자 한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을 나타낼 언어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언어자체가 언어 속에서 말로 표현된 것에 대해 물러서 버린다. 이렇게 물러선다는 것은 그 근거를 “언어가 그 유래와 더불어 언어자체에 집착되어 있고, 그 본질은 표상을 거부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의 본질이 어디서도 본질의 언어로서 언어화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
2.2. 하르트만의 언어관은 “언어는 의미의 의상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이 명제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의상이란 어떠한 몸에 입혀지는 것으로서 몸을 감추고 보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상이 감싸고 그 속에 감추고 있는 몸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의 해석이 성립할 수 있다. 한 편으로는 의상이 감싸고 있는 몸을 ‘의미’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랬을 때, ‘의미’는 언어라는 의상을 통해서 남에게 보여지고 전달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언어라는 의상’을 통해서 ‘의미라는 몸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편으로는 ‘의미의 의상’을 ‘의미라는 의상’으로 보는 견해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의상은 곧 의미이며 언어는 ‘의미로서의 의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의미로서의 언어’, 즉 ‘의미라는 언어적 의상’을 통해서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무엇’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도식화하면 전자에서는 ‘언어 = 의상, 의미 = 몸체’라는 등식으로 압축되고, 후자에서는 ‘언어 = 의미 = 의상, 그 무엇 = 몸체’라는 등식으로 요약된다.
하르트만에 있어서 언어는 ‘정신적 존재의 일종’이다. 정신은 세 가지 존재형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개인적 정신(Personaler Geist), 객관적 정신(Objektiver Geist), 객체화한 정신(Objektivierter Geist)이 그것이다. ‘개인적 정신’은 소박한 이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정신적인 단일성들은 개인적인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정신은 ‘주관적 정신’ 또는 ‘인격적 정신’으로 환언될 수 있다. ‘객관적 정신’이란 초개인적 공동정신이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집단적 정신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활동하고, 그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매체이다. 예컨대, 시대정신, 민족정신, 어떤 계급의, 직업의, 가정의 정신 등등이 객관적 정신인 것이다. 정신의 세번째 형식으로서 ‘객체화한 정신’은 살아있는 개인적 또는 객관적 정신이 물질적 질료 속에 자기를 고정화하므로서 객체화한 것이다. 개인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은 끊임없이 변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살아있는 정신이며, 살아있다는 것은 운동과 변화를 그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객체화한 정신은 다른 정신(개인적 정신, 객관적 정신)을 변천의 동요에서 벗어나게 하여 고정시킨다. 예컨대 각종의 예술적 창작물, 기념물, 기술적 작품, 그리고 어느 한계 내에서의 도구, 무기들, 공업의 산물 등이 객체화한 정신이다. 정신의 이 세가지 존재형식은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우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서로간에 종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병렬되어 있다.
하르트만에 따를 때 언어는 객관적 정신이면서 객체화한 정신이다. 하르트만은 언어를 ‘언어 그 자체’와 ‘말하여진 언어’(글로 쓰여진 언어)로 구분한다. 여기서 ‘언어 그 자체’는 객관적 정신이고, ‘말하여진 언어’나 ‘글로 쓰여진 언어’는 객체화한 정신이다.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 자체’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객체화한 정신으로서의 ‘말하여진 말(언어)’이나 ‘글로 쓰여진 말(언어)’은 살아있지 않은 물질적 질료(음성이나 문자) 속에 고정시켜지므로서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전자(언어자체)는 살아있는 언어로서 말해지고, 후자(‘말하여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는 죽은 언어로서 말해지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서 서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자체’는 ‘살아있는 언어’이며, 객체화한 정신으로서의 ‘말하여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은 ‘죽은 언어’인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죽은 언어’라는 말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와는 다른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리하여 “살아있는 언어를 통하여 하나의 살아있는 민족이 사유하고 자기를 이해하며, 그 언어의 형식들과 낱말들에 있어서 사람들의 표현, 전달, 시작(詩作), 객체화 등이 행하여진다.” 그러나 ‘죽은 언어’는 ‘살아있는 언어’에서 분화되어 나온 언어로서 고정화되었으므로 살아있는 언어의 변천의 흐름에서 벗어나와 있고 “그의 창조물이요 소유물이었던 바의 산 정신보다 오래 존속한다.”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는 공통성과 전체성으로 특징화된다. 여기에 언어의 상호소통적 근거가 있다. 만약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각자가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어의(語義)를 가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이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여진다. 따라서 어의의 일반성은 모든 전달의 기초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최대의 안정성을 가지므로서 언어의 지배영역을 확보하고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기능”(allgemeine Verständigungsfunktion)을 언어가 보장하도록 한다. 언어가 가지는 이와 같은 의사소통의 기능을 하르트만은 공통성을 유통시키는 “화폐”(Scheidemünze)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언어가 정신인 한, 그것은 곧 “정신의 화폐”(Scheidemünze des geistigen)인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공통성과 전체성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그것은 느낌으로서 주어지며 직접적인 공통이 이해가능성에서 입증된다. “언어는 하나로서, 통일적인 전체성으로서 감지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체성의 감지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시대인들을 결합하는 이해의 직립성 가운데 그 증거(Beleg)를 가지고 있다.” 언어의 공통성과 전체성은 바로 공통성과 전체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대상적으로 주어진다. 언어는 ‘소리없이 들어서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이 또한 우리 속에 살아 있지만 실천적 생활에서는 아무런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므로 대체로 대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언어는 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유전되는 것은 아니고 전승되는 것이다. “개개인은 그의 언어를 스스로 조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말하여지고 있는 언어로서 발견하고, 함께 말하는 가운데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언어를 ‘넘겨받는다’ (⋯⋯) 이러한 발견과 넘겨받음은 학습의 기나긴, 다양하게 단계지어진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유전되지 않고 언어의 소질만이 유전된다. “한 어린이가 말을 할 바탕(소질)을 타고나도, 자기의 환경을 통해서야 비로소 말을 배우게 된다. 어린이는 공통적인 언어영역에서 성장함으로써, 자기에게 넘겨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인다. 넘겨주고 넘겨받음으로서 언어는 계속 유지되며, 세기를 거듭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하르트만은 이와 같이 언어의 공통성과 전체성이라는 지반 위에서 언어의 전승과 발전, 비대상성 및 의사소통의 기능을 설명하면서도, 언어는 그 이상의 것이라고 한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언어는 “언제나 동시에 교환의 수단 이상의 것”이다. 그러니까 어의의 일반성은,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 욕구된 것, 직관된 것이나 또는 이해의 대상적 형성에 있어서는 쓸모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주로 객체화한 정신의 영역에서 해명될 문제들이다.
객체화한 정신으로서 ‘말하여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은 우선 존재적으로 2중성의 구조를 가진다. 전경(Vodergrund)과 배경(Hintergrund)이 그것이다. ‘말하여진 말’,의 소리는 전경이며, 그것이 가지는 일반적 의미는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글로 쓰여진 말‘ 즉 문자(기호)는 전경이며 그 문자가 가지는 의미는 배경이다. 전경인 음성이나 문자는 감성적·실사적인 것이며, 배경인 의미나 의의는 비실사적·정신적 내용이다. 이 두가지가 합해야만 말이나 글이 된다. 전경이나 배경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말도 글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소리와 기호를 통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파악한다. 그러니까 전경을 통하여 배경을 파악하게 되는데 이는 곧 배경이 전경으로 현상함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의미‘는 실사(Realität)도 아니고 환상(Illusion)도 아니라 단지 현상(Erscheinung)일 뿐이며, 이 현상은 음향체계 및 기호체계와의 대응의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음성과 의미, 문자와 의미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들의 언어나 방언들에서 입증된다. “문자와 음성과 의미 사이에는 일정한 대응관계가 있고, 이 대응관계에 의하여 말이나 글이 이해되는 것이지, 말이나 글이 의미와 구조, 기타에 있어서 유사하기 때문에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 대응관계는 “거의 일반적으로 단순한 협정에 의한 관계”이다. 그러니까 음향상과 의미(또는 문자상과 의미)의 연관에 대해 본질적인 것은 하나를 다른 것에 부속시킴에 있어서의 그 확고한 규정성 뿐인 것이다. 이 확고한 규정성에 따라 언어의 의미는 고정되고 또한 의사소통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의미의 변통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응관계의 성격에서 밝혀진다. “이 대응관계는 구조적 일치에 영향을 받음이 없이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경우에 가장 자유스럽고 가장 완전하게 기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요소는 고정한 것이지만 이 요소간의 대응관계는 극히 유통적이어서 무한히 다양한 의미내용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대응관계가 단순한 상징적 관계일 때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일시적인 약속에 의해 음성(또는 문자; 필자)과 결부하는 것”이며, ‘말하여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글)은 “전경과 배경의 연결이 하나의 약속에 불과한 객체화”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객관적 정신과 객체화한 정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 하르트만의 언어관을 ‘언어는 의미의 의상’ 이라는 위에서 논구된 명제와 연관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객체화한 정신으로서의 ‘말하여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은 ‘언어 = 의상, 의미 = 몸체’라는 도식에 상응하고,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 자체는 ‘언어 = 의미 = 의상, 그 무엇 = 몸체’라는 도식에 상응한다. 전자에 있어서 ‘언어라는 의상’은 전경이 되고 ‘의미라는 몸체’는 배경이 되며, 후자에 있어서 ‘의미라는 언어적 의상’은 전체성과 공통성으로서의 언어가 되고 그것이 감싸고 있는 ‘몸체로서의 그 무엇’은 결국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2.3. 하이데거와 하르트만은 설사 그들의 이론체계는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을망정, 언어관에 있어서는 약간의 상이성을 도외시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먼저 유사성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만인의 공동재산이며 상호소통의 수단’이라고 한 것은 하르트만이 ‘언어의 공통성과 전체성을 설명하면서 그러한 토대에서 언어의 상호소통적 기능’을 지적한 것과 일치한다. 하이데거가 그러나 ‘언어는 사용수단 이상의 것이라고 한’것과, 하르트만이 ‘언어는 교환수단 이상의 것’이라고 하면서 객체화한 정신으로서의 ‘말하여진 말’과 ‘글로 쓰여진 말’ 및 시와 개념에 대한 연구이행의 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 일치한다. 하이데거가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존재한다’고 한 것은 하르트만이 ‘우리가 언어 속에서 살고 있고 언어가 우리 속에 살아있다’라고 한 것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르트만에 있어서 우리의 삶이 곧 세계일 것이고, 언어의 삶 또한 언어세계의 주요부분으로서의 또 하나의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의 본질은 말함에 있다’라고 한 것과, 하르트만이 “살아있는 정신(언어; 필자)은, 공통하는 정신계의 건설과 유지라는 자기 자신의 당면요구를 위하여 객체화(말함; 필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가 ‘말의 본질은 의미로 다하여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하르트만이 ‘의미의 일반성은 직관된 것 중에는 쓸모 없게 된다’, ‘의미는 고정된 것만이 아니고 변통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과 상응한다. 하이데거가 ‘말함과 존재, 언어와 사물의 공속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르트만이 ‘문자, 음성, 의미의 대응관계’를 논술하고 있는 것과 상응한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자를 개명된 곳으로 불러내는 명명’이라고 한 것과 하르트만이 “인간의 존재방식은 세계를 개시하는 존재자로서 생활하는데 있고, (⋯ ⋯) 세계는 또 인간에게 폐쇄되기 쉬운 것”이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하르트만은 세계를 은폐성으로 보고 인간을 개시성으로 보고 있는 바, 여기서 인간의 특성을 언어라고 본다면 이는 하이데거와 유사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가 ‘언어의 본질을 나타낼 언어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과 하르트만이 ‘언어는 대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이 유사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상이성으로는, 하이데거가 ‘존재자는 말을 통해서 존재자로 된다’고 한 것과 하르트만이 “현존재(Dasein)가 일반적으로 그것의 파악되어 있음(Erfaβtsein)과는 관계없이 존립한다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현존재의 존재적 의미(ontische Sinn)이다”라고 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이 명제를 파악된(이해하여 명명한) 존재만이 존재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하르트만의 명제는 이와 반대이겠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존재이해’와 ‘자체존재’로 특징화되는 두 사람의 기본입장의 상이성에서 연유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이점은, 하이데거가 언어자체와 ‘말하여진 말’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음에 반해서, 하르트만은 객관적 정신-객체화한 정신, 살아있는 언어- 죽은 언어, 언어자체- ‘말하여진 언어’ 및 ‘글로 쓰여진 언어’를 구분하여 논의를 보다 상세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3. 시와 시인
3.1.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는 ‘건설’이다.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며 “시작의 언어(dichtende Wort)는 건설하는 말함(stiftende Sagen)이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는 모든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건설하고 명명하는 것이어서, 결코 임의의 요설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하여 비로소 우리가 일상의 언어 가운데서 이야기하고 담론하는 바 일체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를 하나의 현존하는 창작소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 자신이 비로소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 ⋯) 따라서 거꾸로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앞(1.3)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면, 여기서의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에서 해명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과는 서로 순환논리가 아닌가? 이 순환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이 순환 가운데로 들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도구로서의 사고는 이 순환의 원둘레를 완성시키는 길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가 건설인 한에 있어서, 시작은 하나의 ‘생산해냄’이다. “생산해냄이란 은폐성에서부터 비은폐성에로 제시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해냄은 은폐된 것이 비은폐된 것으로 드러나는 한에 있어서만이 가능하다.” 여기서 은폐된 것이 비은폐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은 곧 원리이다. 그러므로 “시작에 따라 생산하여 냄에서 존재자는 현존성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시작의 규정은 진리의 정립으로서 해석된다. 시작에서 생기는 존립적인 것, 그것이 곧 진리인 바, 거기에서 이름은 사물을 지배하게 된다.
이 이름, 즉 시적 언어는 다의적이면서도 일의적이다. “시의 언어는 독자적인 방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 그리고 일의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무딘 감각을 가지고 시를 대하는 한, 우리는 시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 그러나 시적 언어의 다의성이, 결코 저 무규정적인 애매성 가운데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 ⋯)시적 언어의 다의성은 태만한 자의 부정확성이 아니라, ‘바른 응시’의 주도면밀함에 관계하고, 이 ‘바른 응시’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의 엄밀함이다. (⋯ ⋯) 다의적 언어가 갖는 독특한 엄밀성을 좀 더 고차적인 본질적 의미에서 본다면, 명석하고 일의적인 것이며, 그것은 단순한 과학적인 일의적 개념들이 갖는 기술적 정확성을 무한히 능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자들에게 “오직 필요한 일은 냉정하게 사유하면서 시가 언표한 것 속에서 언표되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의적이면서도 일의적인 언어로 건설하는 진리의 정립, 그것이 곧 시작이다. 그러므로 “시작은 임의적인 것을 멋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한 표상이나 공상, 비현실적인 것 가운데로 소멸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는 ‘기투적 말함’(entwerfende Sagen)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기투적 말함이란,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준비하는 가운데, 동시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을, 그것 자체로서 세계 가운데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는 곧 개시성이며, 개시성에 대한 작품적 응답이 된다. 따라서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 언어자체가 시”이며, “모든 예술은 그 본질에 있어 시작이다.” 왜냐하면 시작과 사유는 하이데거에 있어서 동일하게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모든 사유는 시작이고, 그러나 모든 시는 사유인 것이다.”
시가 건설이라면 그 건설의 일꾼은 시인이다. “시인은 ⋯ 모든 사물을 그 본질에 있어서 명명한다. 이 명명은 이미 알리어진 것을 다만 명칭만으로 불러 보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본질적인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이 명명으로 하여 비로소 존재자가 그 본질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존재자로서 알리어진다.” 왜냐하면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 시이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시인은 시로서 현실적인 것의 근거를 설명하고 또 현실적인 것은 시인이 제시한 현실성을 통해서 비로소 본질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의 근거는 일상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일상인들이 보지 못하는 바로 그것, 자칫하면 사라져버리고 말 그것을 시인들은 바라보고 명명함으로써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시인들은 ⋯ 가시적인 것을 주시함으로써 존재(Seyn, ἰδἐα)를 나타나게(erscheinen)한다.”이리하여 “상주하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건설한다”는 횔더린의 시귀는 하이데거는 반복하여 인용한다. 여기서 ‘상주하는 것’이란 곧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상주하는 것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시작은 곧 시적 대화이다. “시적 대화는 상주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언어를 연마하고, 그리하여 자기의 고유성 가운데 안주할 수 있는 능력의 자유로운 사용을 시인에게 증여한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단지 언표된 대화를 형성할 뿐이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근원적인 대화를 전개하고, 그렇게 전개하는 것, 바로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근원적인 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 대화는 (시인을 통하여) 보내어진 것(즉 존재)이 말없는 가운데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다.” “시인의 말은, 언제나 예감하면서 있는 저 시인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며 통찰한 것을 순수하게 부르는 것이다. 시인이 명명한다 함은, 불리어진 것 자신을 시인으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시인은, 존재가 열어 보이는 곳, 밝혀진 곳, 존재자 전체의 비은폐성 안으로 들어서는 자이며, 일상적 질서를 떠나 근원적 질서 안으로 들어서는 자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 새로운 ‘사실들’의 피상적인 변화의 뒤를 쫓아다니기만 하는 ‘보고자’는 아니다.” “시인의 물음은 사색인의 물음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 ⋯) 시인은 시적으로만 묻는다. ‘물음이 드러나면서 출현하는 것’(Das enthüllende Hervortreten der Frage)은 그러나 하나의 은폐이다. 물음이 외관상 불확실한 것은 이 은폐의 동요이며, 그러나 은폐는 물음의 내용을 예감케 하는 것이다.” “시인은 말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말의 새로운 존재방식이 나타나게 되고” “시인은 자기 스스로를 말의 관리자로서 경험한다.”
시가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인 한에 있어서 이러한 시인의 권한과 역할은 결코 시인만의 것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것으로 일반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현존재는 근본에 있어서는 시인적이다”, “인간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하이데거의 시와 언어에 관한 이론을 통하여 그의 철학사상의 구조적 이행경로를 미루어 본다면, 하이데거는 시의 본질에서 언어의 본질을 밝히고, 나아가서는 언어의 본질에서 현존재의 본질을 밝히는 그러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겠다.
3.2. 하르트만에 있어서의 시는 객체화한 정신의 일종이다. 객체화라고 하는 말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듯이 그것은 벌써 형성을 뜻한다. 왜냐하면 “객체화는 본질적으로 어떤 정신적 상태가 나타날 수 있는 실사형성체(Real-gebilde)의 창작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여기서 ‘실사 형성체의 창작’은 곧 “형성”(Formung)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정신의 품안에서 그것을 섭취하면서 숨쉬고 있는 개인적 정신인 시인의 정신이 문자라는 지구력 있는 질료 속에 고정화된 것이 시이다. 끊임없는 변천의 강물을 흘러가는 시인의 정신이 시로 형성되므로서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 나와 작품으로 남는 것이다. 시로 형성되지 않은 시인의 다른 정신은 변화의 강물을 타고 흘러가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데, 시속에 고정화된 시인의 정신은 시인보다 오래 존속한다. 그러니까 시는 개인적 정신의 언어적 형성이 된다. 물론 시인은 우선 실사적·감성적인 언어로서 전경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것만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비실사적·정신적 내용으로서의 배경 또한 형성한다. 여기까지는 시가 객체화한 정신의 다른 일종인 사상적 저작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사상적 저작물과 시는 서로 다른 것이다. 사상적 저작물은 관조자로 하여금 ‘과학적 이해’ 즉 ‘반성된 이해’를 하도록 하는 반면에 시는 감상자로 하여금 ‘예술적 이해’ 즉 ‘반성되지 않은 이해’를 하도록 한다. 이는 시적 언어와 개념과의 비교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시적 언어의 본질은 시 그 자체에 있고 개념의 본질은 이 개념의 외부에 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자기의 규정성을 자기의 내부에 가지고 있고 개념은 자기의 규정성을 자기의 외부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성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시인은 전경과 배경의 단순한 형성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긴밀히 결부되도록 형성한다는 데 있다. 시인이 형성하는 전경의 풍부성과 배경의 심오성 그리고 그 연계의 긴밀성이 작품적 성공의 관건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잘 갖추어졌을 때 정신적 내용(배경)은 언어(전경)를 통하여 독자 앞에 투명하게 나타나는(현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는 예술가적 언어의 독특한 투명성을 표시한다.” 물론 이것은 시적 표현이라는 독특한 형성력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언어의 독특한 투명성과 형성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우리는 그것을 시인의 독창적 언어 구사력이라고 답할 수 있다. 시인도 물론 언어와 개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시인은 언어로 하여금 단순히 개념적인 해석을 넘어선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말들을 관습적으로 안배하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안배하거니와, 즉 말들로 하여금 그 속에 근원적으로 파악된 다른 의미가 현상하는 바의 이미지로서의 효과를 나타나게끔 한다. 이리하여 시인은 달리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 그 속에선 말해지고 있는 바의 그러한 높은 수준의 구상성에 도달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가장 평범한 목적에로 사용되는 언어가 시의 질료가 될 때, 그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형태 형성도 가능하고, 그것에 의하여 생활에서 달리는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투명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언어를 관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파악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형성체로서 작용시키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한다. 이리하여 시인은 높은 구체성에 도달하고, 그것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을 그 속에 언표한다.” 그러므로 시인과 시인의 시적 형성(시)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시인은 외면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형성하고, 그것이 말(Wort)을 통하여 현상하도록 한다. “시인은 이 외면적인 것의 형성을 통하여서 동시에 그 속에 내면성이 반영되고, 그것이 표상으로 현상하게 하는 것이다.” “시는 저울질할 수 없는 심령적인 것을 이에 못지 않게 저울질할 수 없는 감성적인 것을 통하여 제공한다.” 따라서 시인은 고정적이고 일반적인 말의 의미를 풀어서 살릴 줄 안다. “시인은 우리가 일상용어로 말할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의미를 지닌 일상어가 나타내지 못하는 효과를 (시의 언어는) 나타내며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인이 시적 대상의 본질특징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다. “시인은 ⋯ 본질특징을 선택하며, 또 선택된 여러 가지 본질특징중에서 다시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적으로 대상에 존재하는 여러 본질특징 중에서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무엇을 자유로 조작하거나 끌어들일 수는 없다.” 시인이 선택하는 본질특징을 하르트만은 ‘보물’이라고 한다. “시인은 다른 사람이 본체만체하는 것 속으로 침잠한다. 이리하여 시인의 눈은 숨은 보물로 쏠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눈이 발견하고 가르쳐주는 이 보물은 언제든지 ‘일상의 파편’(Schutt des Alltag) 아래 숨어있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시는 ‘세계를 개시하는’(erschlie βend-weltaufschlieβend-)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형성하는 자’ ‘본 것을 형태형성하는 자’ ‘언어를 형성하고 창조하는 자’ ‘보는 사람’ ‘투시하는 자’ ‘밝혀내는 자’ 등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
요컨대 시인이 시속에 형성한 세계는 적어도 고정된 형성체로는 이전까지 있지 않았던 하나의 새로운 세계이다. 그러므로 시 속에 나타나는 세계는 현실성과 문제들의 저편에 있다. 이리하여 기법상으로 “시인은 어느 정도 현실소외의 수단을 취한다.” 따라서 시에 있어서 “우리는 문자로 씌어진 말의 테두리를 통하여 다시 실사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낯선 인생(세계; 필자)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관조자는 시에서 주어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시는 감상자에 대하여, 감상자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시의 감각적·직관적인 충만한 규정성을 통하여 현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법으로서 “본래적인 시는 인간적인 것들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설적인 것은 이면을 가지지 않으며 배경이 없으며, 그런것은 아무것도 현상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작과 감상은 그 순서가 정반대의 방향을 취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시인은 배경에서 출발하여 전경으로 나오며 시를 형태형성한다. 시인이 배경부터 그려내는 이유는, 이 배경이 바로 표현되어야 할 본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상자는 전경에서부터 배경으로 들어가며 시를 감상한다. 왜냐하면 그가 접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은 전경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배경으로부터 전경을 향해서 그려내고, 감상자는 전경으로부터 배경을 투시하여 탐색해 들어간다. 그러니까 “창작은 옷을 입히는 작업이고, 감상은 옷을 벗기는 작업이다.” 그러나 시의 존재구조로서의 전경과 배경이라는 이층성 관계는 단순한 이층성인 것만이 아니다. “전경은 언제나 그 자체에 있어서 단순하고 단층적인데 반해 배경은 구조적으로 자체 내에서 다시 층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하르트만은 상대적 전경과 상대적 배경이라는 의미에서 외면층과 내면층이라는 용어를 쓴다. 시인이나 감상자 모두다 어느 계층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이 만약 어느 계층을 무시하면 그 결과는 곧 추상적이고 비직관적이고 개념적인 시, 즉 배경에 대한 전경의 투명성이 결여된, 시 아닌 시의 생산이 되고 말며, 감상자가 만약 어느 계층을 무시한다면 그는 곧 예술적(시적)으로 보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전경에서 곧 바로 깊은 배경으로 비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며, 예술적으로 본다는 것은 단순한 직관이 아니며 여러 가지가 합쳐진 것으로서 아무것도 빠트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3.3. 하이데거의 저술 속에는 시와 언어를 주제로 한 독립한 연구들이 많이 있으나, 이에 반하여 하르트만에 있어서는 그러한 독립적 연구가 없으며, 단지 그의 정신철학과 미학의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가운데서 그 한 부분으로서 또는 예증으로서 시와 언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언어에 대한 두 사람의 주장은 놀라우리 만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시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하이데거가 ‘시는 건설이다’(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라고 하는 것과 하르트만이 ‘시는 형성이다’(객관적 정신의 언어적형성)라고 하는 것이 일치하며, 하이데거가 ‘시적 언어는 다의적이면서도 일의적이다’라고 한 것과 하르트만이 ‘시인도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는 언어를 관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파악된 다른 의미로서 구사한다’고 하는 것이 상응한다. 하이데거가 ‘감상은 언표된 것에서 언표되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 하르트만이 ‘감상은 문자로 씌어진 말의 테두리를 통하여 다시 실사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낯선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한 것이 일치하며, 하이데거가 ‘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을 그것 자체로서 세계 가운데로 가져온다’ ‘시는 개시성에 대한 작품적 응답이다’라고 한 것과, 하르트만이 ‘시인은 우리가 일상어로 말할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시인은 시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을 시속에 언표한다’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 시이다’라고 하는 것이 또한 일치한다.
다음으로 시인에 대한 설명으로는, 하이데거가 ‘시인의 작업은 은폐이며, 사색인의 작업은 비은폐이다’라는 논지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은 하르트만이 ‘시인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한 부분 및 시의 존재구조를 전경과 배경간의 성층구조로 설명하는 부분과 상응한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시인을 ‘머무르는 것을 포착하는 자’ ‘일상적 질서를 떠나서 비상한 질서 안으로 들어서는 자’라고 규정하는 것과 하르트만이 ‘보는 사람’ ‘투시하는 자’ ‘밝혀내는 자’ ‘어느 정도 현실소외의 수단을 취하는 자’등으로 규정하는 것이 상응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4. 말의 힘과 시의 힘
4. 1. 사유가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가 또한 사유한 것의 표현이라면 인간은 언어적 존재일 수밖에 없고, 사유나 언어가 모두 정신적 존재라면 인간은 또한 정신적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할 때 언어(정신)는 곧 삶 자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정신)없는 인간의 삶이나 역사를 생각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과 역사 없는 언어(정신)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와 인간의 삶이 이와 같이 불가분의 것이며,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자체가 시’이거나 하르트만의 말처럼 ‘언어와 시는 각각 정신적 존재의 일종’이라면 시와 언어와 삶은 동일선상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시와 언어가 가지는 삶과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 여기서는, 앞에서 이미 밝혀진 두 사람(하이데거와 하르트만)의 이론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함이 물론이지만, 두 사람의 이론을 각각 요약하고 유사점을 정리한 앞의 방법과는 달리 주제 중심으로 두 이론을 종합하는 방법이 취해진다.
4.2. 인간의 삶은 언어 속에 갇혀 있다. 우리가 파악하는 모든 것은 언어에 의하여 형성되고 이해되고 해석되어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 속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으며,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잡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언어가 매개해 주는 대로만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형성되어져 있는 언어의 여러 형식이 매개하는 대로 느끼고, 지각하고, 사유하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함으로써 그 언어를 우리가 소유하고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하게 말했을 때 오히려 우리가 언어에게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르트만은 적절하게도 “우리가 한 언어를 지배한다 라고 일컫는 것은 오히려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언어일반에 대하여 타당하다. 그러나 보다 한정적 언어인 일상적 언어나 개념적 언어에 있어서는 이러한 구속현상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기존의 세계만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뿐이지, 그것이 기존의 세계라는 것을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의 일상적 시각은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들의 용도에 따른 이용가치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줄로 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때그때 이미 언어 속에 체류하다 이러한 체류가 고유하게 파악된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어 자체를 알지도 못한 채 그 언어 속에서 생활하고, 그 언어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어의 일상성 속에 유폐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의 일상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자가 시인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모든 사물을 그 본질에 있어서 명명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적 무의식과 자기욕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이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존재를 건설하는 자이다. 시인이 건설하는 시적 세계는, 이전까지는 있지 않았던 세계, 즉 새로이 창조된 세계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에 언어 속에 갇힌 존재는 이제 시인에 의하여 그가 갇혀있던 언어라는 울타리를 넘어 나와 시작적 언어에 의하여 새로운 언어의 집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언어의 집은 곧 시작품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상적 언어와 개념적 언어는 인간을 ‘구속’시키는 것임에 반해서 시작적 언어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갇힌 곳에서 풀려 나오도록 하는, 즉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 나오게 하는 인도자이다. 그러므로 시는 ‘보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 준다. 여기서 본다는 말의 뜻은 ‘아무 것에도 구속당함이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시는 우리로 하여금 이해 타산을 벗어나 본래적 모습 그대로의 사물을 보고 삶의 본래적 뜻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논어 양화 9) 시를 배우면 흥겨울 수 있고, 보는 것이 가능하며, 무리 짓는 것이 가능하고,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 가능하다. |
그러나 시인이 건설한 새로운 세계, 즉 언어적 형성을 통하여 언어로부터 풀려 나와 인생과 세계의 근원이 개시되는 그 세계는 단지 현상하는 세계일 뿐이며, 또한 새로운 구속이 예비되는 세계이다. 왜냐하면 “모든 해방은 구속을 대가로 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고, 그 세계의 모습을 똑똑히 눈앞에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우리가 생활인으로서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실사연관에서 들어내어져서 있다. 그 세계는 경계지어져 있고, 자체 내에 폐쇄되어 있으며, 독자적인 통일성과 전체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잘라내어진 부분이다.” 이 세계(시작품의 세계)에 예비되어 있는 새로운 구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체 내의 폐쇄성’이며, 시간적 경과에 따른 시적 세계의 일상화 내지는 속화이다.
‘언어 속에 갇혀있음과 벗어나감’ -이것은 인간의 삶이 가지는 본원적 순환이다.
4. 3. 언어가 인간을 자기 속에 구속시키기도 하고 자기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언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가진 생명력이나 활기, 그러니까 꼭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신령한 힘을 말한다.
볼노는 그의 내한 강연록에서 말의 힘에 대하여 립스(Lipps)의 이론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어는 단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그것이 이 현실을 해석한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부족하고, 말이 제대로 이 현실을 변화시키고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편에서 현실에 힘을 미친다. 저주(혹은 축복)의 마술적인 의식(意識), 그리고 추후에 실현될, 그러므로 말이 선행하고 현실이 뒤따르는 그러한 말에 의한 미래에 생길 일에 대한 힘에 관해서 타당한 것은 그대로 다른 형식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반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여태까지 아직 불명(不明)하고 다의적이었던 상황 속에서 말해진, 명백하게 하며 때로 구제적 이기도 한 말, 아마도 오래 동안 망설인 끝에 입밖에 솔직히 낸 말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이든가, 또는 다른 사람에게 퍼붓는 모욕은 세계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도 한다. 모든 말은 행위하며 형성하면서 세계 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결단이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여태껏 산란해 있었던 현실에서 나오고, 그 속에서 이 현실이 “언어화되는” 모든 말은 현실을 변화시킨다. 모든 말은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마력에 비교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곧 립스가 “말의 힘”이라고 할 때에 의미하는 것이다.(⋯ ⋯)
구체적인 특정한 상황 내에서 말해진 그 화자(話者)가 책임지는 말의 이 힘은 다만 외부적 현실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형성(Selbstwerdung)에도 관계한다. 인간은 자신에 의해 발언된 “말”에 의해서 스스로를 확립하고, 타인에 의하여 “그 말에 따라 이해되어지는”것이다. 그는 제멋대로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이 일반적인 연관은 인간이 타인에게 주는, 그러고 나면 그가 거기에 구속되는,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될 말인 “약속”에 있어서 가장 잘 설명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미래 속으로 꿰뚫고 나가고, 말 가운데서 그가 현실 안으로 가져와야만 할 , 그가 실현해야만 할 것을 선취(先取)하기 때문이다. 말은 여기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환경 세계에서 그의 “체면”을 손상 않고서는 발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실천하는 말에 의해서 비로소 그의 확고성과 규정성을 얻는다.
이와 같은 말의 힘을 하르트만은 언령(言靈, Geist der Sprache) 이라고 하면서 언어와 삶의 관계를 말한다. 즉, 인간은 언령에게 몸을 맡긴다. 본능적으로 언령과 동행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언령에 지배당함으로써야 개인의 움직이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또한 “언어는 성스러운 것(Heiligen)의 일어남이다”라고 한다.
언어가 이와 같이 신령한 힘을 가진다고 했을 때,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한 건설”인 시는 더욱 신령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속에 잠재해 있다고 보여지는 불가사의한 힘을 우리는 ‘시령(詩靈)’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시령의 힘으로 “시는 일반적 의미를 지닌 일상어가 나타내지 못하는 효과를 나타내며, 구체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산문의 말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시 구절 속의 말들은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다. 따라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이며, 거기에 시령이 거주한다. 그러나 이 시령은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시령은 시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자가 시 앞에 서서 기다릴 때, 그를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시속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시인이 창작한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말속에 현상하게 하는 시의 위력 그것이 바로 시령의 힘인 것이다. 이리하여 “시의 힘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어떤 힘과도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이 힘은 어떤 다른 외형적으로 더 강한 힘과도 아무런 갈등을 가지지 않으며, 그와는 반대로 아주 힘없고 조용하고 그러면서도 물리칠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그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시인의 말들은 인간을 자신의 편견 속에서 해방시키고, 또한 인간의 상업적이고 이기적인 관심을 잠자게 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사물의 숨겨진 본질을 밝혀주고, 그 속으로 또한 우리 자신 스스로를 완전히 변화케 해주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끔 강요하고 이끈다.”
온전하지 못한 것 속에서 온전한 것을 노래하므로써 하나의 새롭고 완전한 세계를 건설해 내는 “시인들의 언어는 ⋯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예언하는 언어이다.” 그런 한에서 시인들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그 중간에 내던져져 있는” “반신(半身)”들인 것이다.
언령과 시령 - 이들이 인간의 삶을 자중시키고 고양시킨다.
5.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이른바 시의 정의에 대한 문제를, 단적 규정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리의 다수성을 전제한 다양한 규정이 타당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하이데거와 하르트만의 존재론을 중심으로 하고 언어와 시인과 삶이 그것(시)과 맺는 관련을 세부적 탐구영역으로 하여 각각 논의하고 두 이론의 유사성을 검토하였다. 이 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이데거와 하르트만은 기초존재론과 신 실재론이라는 존재론의 서로 다른 두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와 언어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비록 그 표현은 다를지언정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부분이 일치하거나 상응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그들의 이론에 대한 천착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결국 개념적 파악일 수밖에 없고, 그러할 때 하이데거의 개념은 하이데거의 이론체계 안에서 완전할 수 있고 하르트만의 개념 또한 그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개념의 진정한 내용은 개념 그 자체로부터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개념체계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개념이 그 체계 속에서 떨어져 나오면 이 개념은 무내용하여지고, 그 의미를 다시 회복하지 못하며” 더구나 “떼어낸 개별개념은 다시 본원적인 직관으로 채워지기가 어렵고, 그 의미를 상실하거나 맥빠진 추상에 빠지고 말 것” 이라는 하르트만의 지적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와 언어에 대한 하이데거적 개념과 하르트만적 개념의 유사성을 찾기 위하여 상이한 두 개념 체계에서 떨어져 나온 서로 다른 개념, 그것도 개념체계 속에서 떨어져 나오므로써 무내용하여진 개념들을 상응관계로 연결 시키고자한 이 글의 시도는 처음부터 무리했던 것이 아닌가? 이 글의 의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글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하이데거의 이론은 하이데거의 체계 안에서, 하르트만의 이론 또한 그의 체계 안에서 이해 하고자 하여 주제별로 각각 따로 정리·요약하였으므로 그러한 부분(2.1/ 2.2/ 3.1/ 3.2)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두 사람의 이론적 유사성을 찾고자한 부분(2.3/ 3.3)은 위와 같은 염려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사성을 찾고자한 부분은 하이데거나 하르트만의 서로 다른 개념체계에서 파악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글의 의도 및 논술체계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염려는 해소되리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사성의 추출은 하이데거의 시도도 하르트만의 시도도 아니고, 오직 불완전할망정 필자의 시도인 것이며, 필자의 시도는 필자의 의도 및 논술체계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내용’ 파악의 첩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란 무엇인가’하는 이 물음은 시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는 물음이다. 그러나 “근본개념은 일반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시가 과연 근본개념인가 하는 문제는 찬반양론의 주장으로 갈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들어가는 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시의 정의가 다양하다는 것이 이미 이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의 개념규정을 위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가 가지는 근본현상의 “본질특징을 다만 기술함으로써 밝혀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시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현상들을 그 다양성 속에서 추적하고 시 자신에게서 그것을 엿들어낼 것이 요구된다. 요컨대 현상학적 방법이 그것이다. 하이데거나 하르트만이 이 길을 따르고 있으며, 이 글 또한 이 길을 걸어 왔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것은 지금까지 논의한 시와 언어에 대한 약간의 존재론적 해명에 불과하다. 그것은 시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우리의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않은 충실성과 엄밀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시는 시 일반이 아니라 실존적인 개개의 시 작품이다. 어쩌면 그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실존이란 무엇인가? 실존이란 “일정한 때에 ‘거기 있는’ 것은 다른 때에는 ‘거기 있지 않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때에 거기 있는 시, 그것이 바로 시의 실존일 것이며, 이러한 시의 실존만이 시인이나 감상자에게는 보다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 일반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 시의 연구자(철학자나 문학이론가)가 아니라, 일정한 때에 오로지 어떤 시를 창작하는 자(시인) 이거나 감상하는 자(감상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의 연구’는 결코 ‘시’가 아닌 것이다. 요컨대, 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 - 그것은 철학자가 할 일이다. 시인이나 감상자는 시가 무엇인지를 말할줄 몰라도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시가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말할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여전히 시를 잘 쓸 수 있고 또한 현실적으로 쓰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감상자는 여전히 시를 즐길줄 알며 또한 현실적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시와 철학은 영원히 분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 상호화해와 상부상조의 길이 열린다. 시는 철학에게 직관성이라는 장기를 대여하고, 철학은 시에게 본질적 사유라는 도구를 양여한다. 그 이유는 “철학자는 언제나 기성개념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직관적인 표상들(anschaulichen Bilden)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시인은 언제나 일상적 사유를 벗어나 본질적 사유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시 일반이든 시의 실존이든 간에 시가 어쨌든 정신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면 그것에는 정신의 법칙이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할 때 “시(정신; 필자)의 내용은 확장적이고, 인간들을 결합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모든 사람의 소유로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의 성향이 항상 다시 새로운 체험 앞에 세워지는 개인들의 표출성향에 있고”, 그러한 새로운 체험을 부여해 주는 것 중에서 중심적인 것이 시이며, 시는 바로 시인에 의해서 쓰여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시를 통한 세계의 확장과 삶의 고양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바로 시와 시인의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적 삶은 인간의 시민적 삶에 선행한다.”
시와 명성 |
1) 시란 무엇인가
1-1) 詩는 視다
1-2) 시는 명명(命名)이다 --> 명명은 존재에 대한 최초의 의미 부여이다 --> 따라서 시는 자유이며 해방이다 --> 요컨데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1-3) 詩作은 始作이다
1-4) 시작의 주재자는 신이다. <시인은 반신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2)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 좋은 詩는 生水와 같다
3) 명성을 얻고 싶은가 - 명성은 냇물 위에 뜬 단풍잎이다
"말로서 새롭고 완전한 세계를 건설해 내는 시인들의 언어는 예언하는 언어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그 중간에 내던져져 있는 반신半神이다."(M.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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