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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원고] 문학독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다 / 김주완 (2014.05.21.수. 김천 중앙고교)

김주완 2014. 5. 21. 22:29

 

문학독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다_김천 중앙고_김주완.hwp

 

 

-2014 사제동행 독서진로 동아리 세반 [작가 초청 대담] 원고(김천 중앙고/2014.05.21.. 15:20~16:20)-

 

 

 

 

 

 

 

 

문학독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다

 

 

                                                                                                               김주완

 

 

. 세상 밖을 보면서 사는 세상 속의 인간

 

 

사람은 세상 속에서 산다. 학교, , 친구, 직장이라는 세상, 갖가지 세상 속에서 산다. 속은 바깥이 아닌 안이다.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안에 갇힌 삶을 산다. 속의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규율에 지배당하면서 그 요구에 응답하면서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 때로는 일탈하고 저항도 하면서 세상에 맞서 보지만 결국은 처음의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어느 한 두 사람이 없어진다고 해도 세상은 눈도 깜짝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는 양 그전으로 돌아간다. 독자성이나 개성이라는 것은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 아무리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물고기가 물밖에 나와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은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 수가 없다. 사람은 세상의 일부이며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적 존재이다.

 

물론 사람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살 수가 있고 군대나 교도소와 같은 일상적 소속과는 다른 집단이나 공간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곳도 마찬가지로 세상이다. 다만 그 이전에 살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일 뿐이지 아예 세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그곳의 규율이 있고 통제가 있다. 사람은 세상에서 세상으로 옮겨 가면서 살 수는 있지만 세상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세상 속의 존재이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세계내 존재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인간은 답답하다. 숨이 막힌다. 학교라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은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가정이라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년한 자식들은 빨리 결혼하여 독립하고 싶어 한다. 탈출욕구는 구속의 상태에서 생겨나는 해방욕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욕구는 완전하게 달성할 수도 충족할 수도 없는 근원적인 욕구일 뿐이다. 이 욕구는 세상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다만 만족해야 하는 욕구이다. 갇힌 자는 끊임없이 담장 밖을 동경한다. 담장 밖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현실적으로 담장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다만 바라볼 뿐이다. 그리워할 수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세상 속에 갇혀서 세상 밖을 바라보면서 꿈꾸는 존재이다. 그러나 꿈 또한 하나의 세상이다. 따라서 인간은 수많은 세상을 가질 수는 있지만 단 하나의 세상도 초월할 수가 없다. 몸담고 있는 세상에 갇혀서 다른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가 현실적 인간이다.

 

 

. 마음 밖의 세상과 마음속의 세상

 

 

세상은 마음 밖에도 있고 마음속에도 있다. 마음 밖의 세상이 객관세계라면 마음속의 세상은 주관세계이다. 전자가 사물세계라면 후자는 심리세계이다. 사물세계는 시공간적으로 현실에서만 존재하지만 심리세계는 시간, 공간적 한계를 벗어난다. 심리세계인 마음속의 세상은 먼 과거로 돌아갈 수가 있고 어딘지도 모르는 미래로 나갈 수도 있다. 기억이나 회상, 상상이나 전망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육안(肉眼)이 아닌 심안(心眼)으로 세상 밖을 바라볼 수 있고 세상 밖으로 넘어나갈 수 있다.

 

마음 밖의 세상은 드러나지만 마음속의 세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마음속의 세상은 은밀하다. 자유롭고 보다 풍요롭다. 사람들이 꿈이나 희망이나 소원을 가진다는 것은 모두가 마음속의 일이다. 마음 밖의 세상은 한계가 있지만 마음속의 세상은 한계가 없다. 마음속 세상의 넓이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든지 그가 가지고 싶은 넓이만큼 가질 수가 있다.

 

성경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했다. 부유한 곳간은 가득 차 있고 가난한 곳간은 텅 비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마음이 텅 비어있는 자이다. 마음이 비어있다는 것은 탐욕과 증오와 아집이 없는 순수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의 바로 그 말씀은 마음이 순결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로 환언될 수 있다. 순결한 마음, 텅 빈 마음을 가진 자는 그 빈 공간에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채울 수 있다. 그러한 채움에는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그가 채우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채울 수 있으므로 그것이 곧 복이 되는 것이고 천국이 되는 것이다. 자유와 평안이 제한 없이 보장되는 곳이 곧 천국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자유의 진정한 거소는 마음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양심의 자유라고 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닿아 있고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도 여기에 닿아 있다.

 

 

. 세상을 넓게 보면 삶이 행복해진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은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 명예, 지위, 학벌, 외모, 건강이 행복의 조건인가? 언뜻 생각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외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많이 갖춘 자도 불행할 수가 있다. 인간은 외적물질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인간은 외적물질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내적정신적 존재이다. 인간에게서 물질적 측면만을 강조하면 동물로 수렴되며 정신적 측면만을 강조하면 신으로 수렴된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세계를 인간은 함께 가지고 있다. 물질도 세계이고 정신도 세계이다. 두 세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 외모가 부족하면 내면을 가꾸어서 보충하고 돈이 적으면 보다 높은 품격과 자긍심을 갖추어 균형을 잡으면 된다. 물질과 정신의 조화는 세상을 넓게 보아야 이룰 수 있다. 갇혀 있는 세상 속에 살면서 자기가 갇혀 있는 세상을 넓게 바라보면서 또한 바깥세상까지도 바라볼 수 있어야 물질과 정신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세상을 좁게 보면 좁은 것이 전부인 양 느껴진다. 남들은 돈과 명예를 많이 가졌는데 나만 그렇지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위, 학벌, 건강, 외모도 마찬가지이다. 나보다 못난 사람은 적고 잘난 사람은 많아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넓게 보면 그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질적인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겸손, 사랑, 절제, 정의, 근면, 용기, 자긍, 책임, 나눔, 고결, 순수 등의 정신적도덕적 가치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예술의 아름다움도 있다. 외모는 남들보다 뒤떨어지지만 나는 더 정의로울 수 있고 돈은 궁핍해도 베푸는 사랑은 남들보다 더 풍부할 수 있다. 집착하는 삶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우칠 수도 있으며 위대한 자연 앞에서 경건해지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세상을 넓게 본다는 것은 세상을 많이 가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얼마나 많은 세상을 보는가, 그리고 가지는가, 바로 그것이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잡아줌으로써 행복을 얻는 지름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세상을 넓게 보면 대상이 왜곡되거나 변형되어 보이는 것이 보정될 수 있으며 사람은 자기오만이나 자기비하에서 벗어나 삶의 긍정적 주체로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 ‘본다는 것의 의미 평면적 보기, 입체적 보기, 투시적 보기

 

 

살아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보면서 살아간다. 사람은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들어보고 코로 냄새 맡아 보고 입으로 먹어 보고 피부로 느껴 본다. 뿐만 아니라 만져 보고 부딪쳐 보고 들어가 보고 나가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기능을 모두 갖춘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부의 보기 기능이 결여된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보기의 기능이 더욱 발달함으로써 부족한 보기를 보충한다. 예컨대 맹인은 청각과 촉각이 더 많이 발달한다. 보는 것은 아는 것으로 이행한다. ‘눈으로 바라보는것은 보아서 알게 되는것을 의미하고 귀로 들어보는 것들어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보기으로 나아가는 출발인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은 새로운 보기가 가져다준다.

 

생활 주변에서 이미 익숙해진 것들이 아닌 새로운 것들을 보기 위하여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여행을 통해서 견문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풍경, 낯선 사람들, 생소한 생활상 등 새로운 것을 봄으로써 그러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된다. 여행이 이러한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행만이 보기와 알기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칸트는 그의 출생지인 퀘니히베르그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었지만 범우주적인 보기와 알기를 이루어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보기와 알기는 사색과 명상 또는 깊은 성찰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기와 알기에는 여러 단계와 방법이 있다. 우선 인간은 보이는 것만 본다. 누군가가 보여 주는 것만을 보게 된다. 보이는 것을 보고 숨은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평면적 보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여기서 본 것과 저기서 본 것을 종합하고 구성하여 전체의 윤곽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입체적 보기이다. 나아가 인간은 보이는 것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를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상상력이나 추리력으로 보는 것으로서 투시적 보기라고 할 수 있다.

 

평면적으로 보든, 입체적으로 보든, 투시적으로 보든 간에 인간은 대상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도 있지만 잘못 볼 수도 있다. 착시나 오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착시나 오인 또한 하나의 세상이다. 어쨌든 인간은 세상을 보면서 살아간다. 더 보거나 덜 보거나, 좁게 보거나 넓게 보거나 하는 개인적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시력의 차이나 관심의 다름에 따라서 보는 대상이나 정확도는 다르더라도 산다는 것은 결국 본다는 것이다.

 

 

.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문학독서

 

 

새로운 지식에 눈 뜨게 하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전통적 방법이 독서이다. 갇힌 세상에 살면서 바깥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독서인 것이다. 이와 대비했을 때 디지털 시대에 새로 등장한 방법이 영상이라 할 수 있다. 뇌과학에서는 독서와 영상의 인지과정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영상을 볼 때는 그림이 뇌로 바로 전달되고 독서를 하게 되면 뇌 속에서 글자의 내용이 그림으로 만들어진 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이 다시 뇌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서에서는 영상보다 하나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뇌의 활성화와 노쇠방지에 그만큼 더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TV를 많이 보는 것보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독서의 종류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면 과학독서와 문학독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과학독서는 머리로 하여야 하고 문학독서는 가슴으로 하여야 한다. 과학독서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이성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는데 반해서 문학독서는 편하게 접근하여 감성적으로 느끼면 된다. 물론 문학독서를 통해서도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을 얻을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느낌에 부가되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독서의 또 다른 특징은 감동과 동일화에 있다. 과학독서에서도 새로운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을 때 지적 만족이나 희열은 있을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감동이 없다. 문학독서에서는 줄거리나 주인공 또는 분위기에 동화될 수 있고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작품 속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전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슬픔을 작품 속의 슬픔이 아니라 현실적인 슬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독자는 작품 속의 슬픔을 슬픔으로서 슬퍼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인공의 비애를 같이 슬퍼하면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슬픔을 씻어낼 수 있다. 이것이 독서가 가지는 카타르시스적 기능이다. 여기서 독서의 치료효과가 생기게 되고 독서치료라는 새로운 분야의 대체요법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다.

 

정규 학교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문학교육, 그러니까 시나 소설의 이해와 분석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 그것은 시험 출제에 대비하여 정형화한 이론적 분석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도출하기 위해서 거쳐 가야 할 과정을 미로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 출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적 문학독서는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하지 않다. 편하게 읽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 된다. 감상의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이다. 감상을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작품 그 자체밖에 없다. 그와 같이 자유롭고 편한 문학독서의 감동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것이다.

 

 

. 문학독서-자기 것을 보태어 더욱 확대되는 세상

 

 

과학독서는 거기서 서술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만 이해하여야 한다. 정확하게 저자가 의도한 대로만 읽어가야 한다. 하나의 이해, 하나의 해석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독서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독자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면 되는 것이다. 열의 이해, 백의 해석도 가능하다. 감동을 더 받고 덜 받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자는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자기 것을 보태어서 읽을 수가 있다. 자기 것을 보탠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먼저 주어진 문학작품은 작가가 생산한 것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감상된 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공동 생산품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자기 것을 보태어서 작품을 읽는 독자는 공동작가가 되는 셈이다. 다음으로 자기 것을 보태는 것이 대단히 자유롭다는 점이다. 읽을 때마다 독자는 자기 것을 다르게 보탤 수가 있고 많이 보탤 수도 적게 보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가 공동작가가 되어 자기 것을 보태어 읽음으로서 더 많은 다양한 세상을 보게 된다. 또한 독자가 보고 싶은 세상을 어느 정도까지 만들어 내어 볼 수도 있다.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시를 예로 들어 말해 보자.

 

 

 

   초토(焦土)의 시 11

           - 적군묘지 앞에서 -

 

 

                                   구 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리면

   가로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 여기서 적군은 북한 공산군을 가리킨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시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참상을 소재로 한 시이다. 초토화된 강과 산을 노래한 연작시집 초토의 시(청구출판사, 1956)에 수록된 시편 중의 한 편으로서 국군이 만들어 준 북한군의 무덤 앞에서 느낀 소회를 노래하고 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이 시를 통하여 한국전쟁의 참혹한 실상과 휴머니즘의 본질을 공감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질 수 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적군과 아군이란 무엇인가? 적군은 죽어서도 적군으로 대치하겠는가? 개별적 인간이 바라는 것은 전쟁인가, 평화인가? 독자는 이 시를 읽음으로써 이러한 근원적 물음들에 직면할 수 있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 더 너그러운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죽음 앞에서 관대해지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대하여 보는 눈이 넓어질 수도 있다.

 

 

 

   속 2 / 김주완

 

 

   속에 불났다

   네가 남기고 간 다홍빛

   미소 한 잎이 불꽃 일구었다

   나는 활활 타는데

   죽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물이다

   천 리 밖에 있는 네가 물이다

 

 

 

이 시는 가슴 속에서 불타는 사랑을 노래한 시이다.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란 이렇게 간절하고 뜨거운 것이구나라고 느낌으로써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맞지, 맞아!’라고 공감하면서 지나간 자기 자신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고 동일화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양자 모두 이 시를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나무 / 김주완

 

 

   새는 이제 오지 않는다 보얗게 밤을 새우며 고이 받아 든 눈송이 가지마다 가득한데 기다리는 새는

   종일토록 오지 않는다 늦은 저녁 때 바람 한 줄기 가만히 다가와 잔가지 눈가루 포실포실 흩날려도

   기다리는 새는 오지 않는다 새발 타투* 하나 파랗게 찍히고 싶은데 날이 저문다

 

 

    *타투(tattoo) : 문신

 

 

 

이 시는 기다림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의 라는 시어를 소녀라는 시어로 바꾸어 읽으면 사춘기의 곱고 맑은 짝사랑 이야기가 되거나 혹은 저 세상으로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슬픈 노래가 된다. 이와는 달리 라는 시어를 행운이라는 시어로 바꾸어 읽으면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제와 연결될 수도 있다. 이처럼 시의 언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가 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이를 두고 시의 언어는 다의적(多義的)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시어를 바꾸어 읽음으로써 또 다른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바로 이것은 자기 것을 보태어 읽음으로써 더 확대된 세상을 보는 경우가 된다.

 

 

. 텍스트의 전승과 만인에의 증여

 

 

문학독서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 주는 이러한 기능은 당 시대의 사람들은 물론 시대를 넘어서 다음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의 창작정신은 작품 속에 녹아들어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 작품으로 창작되어 작품집으로 묶어지지 않았다면 사라져 버릴 작가의 창작정신이 고정화 되어 시대에서 시대로 전승되는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는 도서관이나 인터넷 공간에 보존되어 있다가 다음 시대의 누군가가 읽음으로서 바로 그 독자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도록 만들어 준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를 향유하더라도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으며 감동 또한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텍스트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창작하여 작품을 내어놓음으로써 그의 역할을 다한다. 즐기고 누리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독자의 몫이다. 작가의 창작활동과 그 결실인 텍스트는 만인을 위해 작가가 내어놓는 증여이다. 작가는 내어주고 독자는 나누어 받는다.

 

텍스트는 두고두고 세상을 밝히는 불빛이다. 당 시대는 물론 다음 시대의 사람들이 그 불빛을 쪼이며 추위를 녹이고 어둠을 헤치며 길을 찾는 길잡이가 된다. 따라서 문학독서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는 이러한 일은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텍스트가 존속하는 한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문학작품의 존재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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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시인, 철학박사(예술철학 전공)

   전) 대구한의대 교수

   현) 한국문협 이사

   현) 대한철학회 고문

   시집 구름꽃, 어머니, 엘리베이터 안의 20,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미와 예술

   논문 시의 정신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 시와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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