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순수 서정으로 가는 탈속의 시업
김주완(시인, 철학박사)
1. 정신 11권
김종섭 제11시집 『시(詩), 관음에 들다』를 펼친다.
열한 권이라…, 우선 숫자에 압도당한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시집 한 권 내놓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과정도 과정이려니와 심적•물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평균 3년에 한 권씩 낸다고 하더라도 열한 권을 묶으려면 삼십년 이상이 족히 걸린다. 사회활동을 시작한 후의 삼십년이란 한 사람의 거의 한평생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시인은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였으며 경주문협 회장, 경북문협 회장을 거쳐 지금은 한국문협 부이사장 4년차의 문단 경영을 맡고 있다. 경주에 살면서도 서울을 이웃인 양 드나들고 있다. 학교 일이나 문단 일이나 그냥 자리만 지킨 것이 아니라 자리마다 빛나는 공적들을 남겼다. 누군가 ‘바쁜 가운데서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종섭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시는 정신이다. 시집은 정신의 집이다. 정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러나 시인의 정신은 정신의 정신이다. “시인의 시적 삶은 인간의 시민적 삶에 선행한다.”는 하이데거의 통찰이 이를 뒷받침한다. 시인의 시적 삶이 곧 시인의 정신적 삶이다. 시인의 정신은 일상인의 정신보다 한 걸음 앞서 나아가는 삶을 산다는 말이다. 시 한 편, 한 편에 시인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일상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일상인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향하는 시인의 연민하는 눈이 마침내 포착할 수밖에 없는 시적 진리와 우주적 사랑이 시의 척주가 되는 것이다.
열한 권의 시집 속에는 시인의 그때마다의 시정신이 녹아 있을 것이다. 시정신도 변모하고 성장한다. 열한 권에 이르기까지 김종섭 시정신의 핵심을 규정하고 그러한 시정신이 단계별로 어떻게 변모하고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여간 규모가 큰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전개와 이를 직시하고 해석하는 한국 현대문학의 흐름을 배경으로 하여 김종섭 시인이 상재한 열한 권의 시집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변모 양상을 포착하여야 할 것이고 김종섭 시정신의 변모는 또한 한국 현대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밝혀냄으로써 김종섭의 시를 문학사적으로 자리매김 해야 할 작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방대한 작업은 필자로서는 역부족이다. 다음 시대의 학자들에게 맡겨놓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김종섭 제11시집 『시(詩), 관음에 들다』에 수록된 시들에 한정하여 김종섭 시정신의 현재적 좌표를 탐색할 것이고 해석학적으로 풀어볼 것이다.
2. 표제 시의 배경
먼저 표제 시 「시, 관음전에 들다」를 살핀다.
아! 이렇게 시가 되는구나. 놀랍다. 이 시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필자는 안다. 2행의 <시인들> 속에 필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살려 그날의 그림을 다시 구성해 본다.
2013년 10월 20일, 일요일이었다. 필자는 젊은 여류 김인숙 시인 부부와 함께 경주로 달려가 김종섭 시인을 만났다. 경북문협 100인 시화전에 전시되었던 시화작품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경북 경주시 성건동 306-1, 시인이 한 평생을 살아온 주소지의 자택을 찾는다. 필자의 대구고등학교 3년 선배 되는 김종섭 시인의 집인데도 어쩌다 보니 첫걸음이다. 필자는 참 미욱하다. 양옥 단독주택 2층, 네 벽을 둘러싼 서가의 책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시인의 서재는 고풍스러웠고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침대는 시인의 집필 작업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입증하고 있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시내로 나와 점심 식사를 하였다. 사모님도 모시고 나온 터라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보통으로 때웠다.
베레모를 쓰고 카메라까지 메고 나온 시인은 우리를 문정헌으로 안내했다. 문정헌은 2012년 경주에서 개최된 국제펜대회를 기념하여 설립된 작은 도서관으로서 관광객이 쉬어가는 북카페 형식의 공간이다. 여직원이 내온 차를 마시며 소장된 도서와 김종섭 시인의 저작들을 살펴보았다. 시내에 있는 법장사를 둘러본 뒤 시인은 우리를 남산(금오산)의 탑골 마애불상군으로 데려갔다. 단체 관광객만 드문드문 들리는 한적한 곳이다. 골짜기를 조금 올라가자 높이 9m, 둘레 26m의 바위에 수십 구의 불보살상과 보리수 등 다양한 상들이 빽빽이 새겨진 암석이 자연 상태 그대로 있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가 많은 골짜기라고 해서 이곳을 부처골이라 부르고 마애불상군은 부처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는 기념사진을 많이 찍었다. 교직에서 정년퇴직을 하신 사모님 서명옥 여사는 온화한 표정을 아름답게 짓는 빼어난 미인이시다. 사진발도 잘 받는 분이다. 부처바위 옆에 있는 옥룡암(불무사) 경내도 둘러보았다. 옥룡암은 이육사 시인이 순국 2년 전인 1942년에 폐질환으로 잠시 요양한 사찰이라고 한다. 요사채 쪽마루 위에는 주워 놓은 은행알이 자루에 가득 담겨 있다. 노송이 절 마당에 몇 그루 서 있고 요사채 지붕을 덮고 있는 굵은 가지는 구렁이 같다. 옥룡암 외곽 부처바위 바로 옆에 관음정을 가리키는 키 낮은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관음정은 보수가 되지 않은 상태로 문이 열려 있었고 김종섭 시인은 우리를 그리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당 끝에는 키 큰 은행나무가 좌우로 우뚝하니 서 있다. 멀리 골짜기 아래로 경주 시가지가 살짝 내려다보이는 듯하다. 마음이 편하다. 이제 그만 시내로 들어가 김종섭 시인 부부를 댁으로 모셔다 드리고 우리는 대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보내줄 기미가 영 보이지 않는다.(김종섭 시인은 이때 이미 우리를 저녁까지 먹여서 보낼 작정을 했던 것 같다. 점심 식사를 대접 받은 것에 대하여 내내 부담스러워 한 것을 보면 그런 짐작이 든다.) 낡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요즘 유행하는 **라는 말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김종섭 시인이 재담을 하기 시작했다. 구수하고 감칠맛이 나는 시인의 말솜씨에 우리는 모두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이야기의 주제와 색깔이 자꾸 진해진다. 시쳇말로 Y담을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흐트러지면 “이 담이 뭐지요?”라고 사모님에게 묻기도 하고, 아예 “이 얘기는 당신이 해요. 나보다 더 잘 하잖아요”라고 하면서 사모님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라 듣기가 거북한지 김인숙 시인 부부가 슬며시 자리를 피해 마당 끝으로 가더니 은행 알을 줍는다. 그냥 듣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줄담배를 피우던 필자도 Y담 몇 토막을 거들었다. 여기까지가 표제 시에서 묘사된 풍경의 실상이다.
내친김에 그날의 이야기를 끝까지 해보자. 6시가 가까워지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관음정을 출발한 우리는 흥무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철길 아래 하수구 옆 음침한 굴다리 샛길을 통해 금산재 옆의 이름난 국수집으로 갔다. 그런데 문을 닫았다. 바로 옆의 금산재에서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향사를 행사하는 날이어서 휴무한다는 것이다. 다시 시내로 나가기에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시인은 성큼성큼 금산재로 걸어 들어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잠시 뒤에 나와 우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서는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제관들이 방문을 열어놓고 환담을 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부인네들이 모여서 분주하게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운데 마루로 올라갔고 제사 음식을 그득히 차린 상을 받았다. 김종섭 시인 덕분에 우리는 흥무대왕의 음덕을 입어 흥무대왕 보다 먼저 귀한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 나오면서 김종섭 시인이 입속말로 한 말씀을 하셨다. “돈도 안 들이고 저녁 식사를 대접해서… 미안해요.”라고.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거나 부담을 주는 일을 지극히 싫어하는 시인의 고결한 성품과 남다른 자존심을 필자는 그날 현장에서 목도했다. 사설은 여기쯤에서 끝내고 이제 표제 시를 읽어보자.
3, 탈속의 시관(詩觀)
어느 가을 날,
수많은 마애불에 취했던 시인들이
천년의 산문에 들었다.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을 돌아
이름에 끌려 관음전 난간에 앉았다.
부처의 번득이는 눈길에 주눅 들어 있다가
비로소 인간이 된 듯,
육두문자 음담패설을 쏟아내며
스님께 올릴 은행알도 몰래 거두고
담배 연기로 나한들의 코를 벌름대게 했다.
그렇구나, 무장무애 그 일탈의 자유가 곧 해탈
그것이 바로 저마다 살아있는 부처인 것을
노을 깔리는 산사의 뜰에
부처님 목소리 영글어 열매로 떨어진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으로
관음전 마당에 법어가 펼쳐진다.
어쩌면 눈 먼 시인들 눈에
가을 날 맑게 씻긴 시어들이 보인다.
관음(觀音)은 관음(觀淫)이고,
시(詩)는 불(佛), 불(佛)은 시(詩)라는 듯.
 ̄ 「시, 관음전에 들다」 전문
1행에서 10행까지는 위 2에서 말한 사정 그대로이다. 음담패설, 은행 알의 절도, 절집에서의 흡연 등 이러한 행위는 매우 불경스럽다. 그러나 김종섭 시인은 이러한 행위들을 일탈의 자유라고 한다. 시중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해탈이라고 한다. 딴은 맞는 말이다. 해탈은 곧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일이니까 말이다. 해탈하면 내외적인 장애가 모두 없어진다. 장애가 없어지면 평소에 못했던 언행도 편하게 할 수 있게 된다. 음담패설, 은행 알의 절도, 절집에서의 흡연 등 그러한 행위를 대중이 왕래하는 도심에서 했다면 마땅히 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빈 절집에 앉아 웃고 떠들고 담배 피우고 또 떨어진 은행 알을 한가로이 줍는 사람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바의 번뇌를 벗어나 있는 여기, 이 자리, 지금, 이 사람들이 바로 ‘살아있는 부처’라는데 누가 이의를 달 수 있겠는가.
화자의 진술은 한 걸음 더 심층으로 들어선다. 시인들의 말은 부처님의 말씀이 되어 영글어 떨어지는 은행 열매와 등치되고 관음전 마당으로 떨어지는 은행잎은 노랗게 물든 채 펼쳐지는 법어와 등치된다. 그렇다. 시인들은 이미 탈 자아의 상태에서 음담패설을 하고 흡연을 하고 은행 알을 주운 것이다. 욕정이 솟아 음담패설을 한 것이 아니고 절집을 욕보이려 흡연을 한 것도 아니며 재물로 삼겠다고 은행 알을 주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그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을의 한가운데서 가을을 한가로이 놀았던 것이다. 구상 시인이 만년에 상재한 시집 『유치 찬란』과도 맥이 닿는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탈속적 통찰로 표제 시는 마무리 된다.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눈멀어 있다. 김종섭 시인이 보기로는 그렇다. 로마인들은 <시인은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는 우주만물의 본 모습을 시인이라면 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시인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아 내어야만 독창적인 시인이 될 수 있다. 보기 위해서는 눈이 맑고 밝아야 한다. 그래야 맑은 시어들을 찾을 수 있다. 맑은 눈이 맑은 시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눈멀어 있다. 그러나 “가을날” 산사에서 탈속하여 부처가 된 시인의 눈에는 “맑게 씻긴 시어들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날 김종섭 시인의 눈에 비친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관음(觀音)은 관음(觀淫)이고, / 시(詩)는 불(佛), 불(佛)은 시(詩)라는” 것이다.
<관음(觀音)은 관음(觀淫)>이라고 한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관음보살은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다.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현세적 세상을 지켜주는 부처이다. 글자의 뜻만으로 보았을 때 관음(觀音)은 ‘말을 본다’는 의미이다. 말을 보는 자는 곧 시인이다. 일상인이 쓰는 일상어를 쓰되 일상인과는 다른 뜻으로 말을 보고 쓰는 자가 시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시적 행위는 곧 관음(觀音)이다. 시인이 현세적 세상을 미적•시적으로 지키고 변방의 음습한 곳에 밀려나 있는 존재에게 연민의 정을 쏟아 부음으로써 현세적 세상을 지키는 존재라면 시인은 곧 관음보살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말인 관음(觀淫)은 음란한 것을 보는 일이다. 음란은 도덕적 규정이다. 이러한 도덕규범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달라진다. 상대적인 것이다. 어디까지가 음란인가 하는 기준은 일도양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덕적이든 법률적이든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음란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상당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야만 음란인가, 아닌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도덕을 포섭하면서도 능가한다. 신앙과 윤리는 본질을 달리 한다. 부처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음란 또한 가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살아 있으니까,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음란할 수 있고 음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관음은 엿보기이다. 한국의 전통 혼례에서는 신방 엿보기가 용인되는 관례가 있었다. 엿보기는 동물적 존재의 기본적인 행위 양태이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가의 논리로 보았을 때 부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 가치를 동일하게 존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 약동인 관음(觀淫)을 관음보살은 과연 질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바탕 위에서 김종섭 시인이 <관음(觀音)은 관음(觀淫)>이라고 한 말을 표제 시의 전체적 전개과정에서 되짚어 본다면, 부처골에 들어와 탈속한 시인들이 나눈 음담패설은 이미 속세의 음담패설이 아니라 선계(仙界)의 진언(眞言)이라고 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관음(觀淫)이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미적 판단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은 무해하고 무한정한 미적 쾌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미학의 기본 원리를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관음(觀音)과 관음(觀淫)의 발음상의 동일성에서 시인이 이 표현의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위의 논의는 유효하다.
<시(詩)는 불(佛), 불(佛)은 시(詩)>라는 언술은 관음 동일성 명제(관음(觀音)은 관음(觀淫)이다.)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자어를 뜯어 읽었을 때 시(詩)는 ‘절에서 하는 말’이고 불(佛)은 ‘사람을 걱정하는 일’이다. 속세의 사람을 걱정하는 일이 부처의 일이고 부처의 말씀은 스님의 염불을 통해서 절에서 말해진다. 그러므로 시가 부처이고 부처가 시가 되는 것이다. 시인을 부처로 만들고 시를 부처의 말씀으로 만드는 김종섭 시인의 시적 진술은 지금 일흔을 바라보는 시인의 탈속적 통찰에서 나온 각(覺)의 진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화자는 또한 “이름에 끌려 관음전 난간에 앉았다”고 한다. 여기서의 ‘끌림’은 통찰에 대한 예감이며 선견이다. 시인은 이미 관음(觀音)이라는 말에서 시의 언어를 생각했다는 말이고 편한 말 속에서 시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말이 된다. 한마디로 하여 표제 시는 김종섭 시인 고유의 <탈속의 시관(詩觀)>이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순수를 지향하는 서정시
탈속의 시인은 순수를 지향한다. 헌옷을 벗고 나오는 반짝이는 새 몸처럼, 탈속은 속세의 마음을 벗어던지고 맑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념도 원한도, 명성도 인기도 미련 없이 벗어버리는 영혼을 동경한다. 모든 장애를 벗어난 순결한 영혼을 되찾고자 한다.
타오르는 만산홍엽
색계의 요부, 청상의 원혼이다.
기구했던 여인의 한이 토해낸 각혈
얼룩진 소복을 불태우는 광염(狂炎)이거나
정념(情念)을 사르는 절정의 몸부림
창부의 피맺힌 절규이다.
마침내
새소리, 푸른 물결에도 눈길 주지 않고
비바람 눈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고의 나날들
오욕칠정의 티끌까지도 비워내고
무상으로 돌아온 구도자의 모습.
가식과 위선을 벗고 나목으로 가는 길
나도 저 같이 탈속할 수 있을까
본성으로 돌아간 찰나의 성스러움.
 ̄ 「단풍, 나목으로」 전문
시인은 단풍과 나목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타오르는 단풍은 정념의 절정으로 본다. 단풍은 요염한 여인이 되고 원한 품은 귀신이 되고 얼룩진 소복을 불태우는 미친 불길이 된다. 정념을 불태우는 몸부림이 절정에 이르면 “창부의 피맺힌 절규”가 된다. 단풍을 보면서 삶의 열정의 절정을 떠올리는 시인은 그 부질없음을 깨우치고 나목을 동경한다. 나목은 부질없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시인은 나목이 되고 싶어 한다. 나목은 잎을 모두 벗어버린 빈 몸이다. 아무 데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오욕칠정의 티끌까지도 비워”낸 구도자의 모습이다. 무상을 무상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구도자는 성스럽다. “가식과 위선을 벗고” 빈 몸으로 돌아간 나목은 이제 본래의 제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처음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순수의 상태이다. 순수는 곧 빈 것이기 때문이다. 탈속 지향은 곧 순수 지향이다. 때 묻어 속된 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순수해지는 일에 다름 아니다.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은 순수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다음 시는 순수회귀의 간절한 기원이 주조를 이룬다.
겨울이면 나는
해 저물어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곳에 가렵니다.
호롱불 켠 밤, 화롯가에 둘러앉아
할머니 얘기에 눈망울 말똥이며
귀를 세우던 그 시절로 가렵니다.
아버지 우렁우렁 신문 읽으시고
형제들 떠들며 다투는 소리들
다시 듣고 싶어지는 곳,
낙엽들이 뒤란 구석마다 바스락대며
쥐떼들의 놀이터가 되는
그곳으로 가렵니다.
엄니 손맛으로 누렇게 익은 김치
할아버지 끓이시는 소죽 냄새
우리들 뼈대와 오감을 키워주던
옛집으로 가렵니다.
밤이면 몰래 군것질꺼리 가져와
긴긴 겨울을 두런두런 이어가던
그 옛집에 지친 몸 일으켜
지금도 달려가렵니다.
 ̄ 「그곳에 가렵니다」 전문
유년의 시골 고향집 풍경을 회상하여 노래한 시이다. 회상은 인간이 부여받은 축복이다. 물론 끔찍한 지난날에 대한 회상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회상은 회상이라고 하지 않고 잊고 싶은 기억이라고 한다. 혹독했던 지난날도 세월이 지난 후 그 일들에 대한 기억이 발효되고 숙성되어 그리운 것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추억이라고 하고 아련하게 회상한다고 말한다.
시골 고향집 풍경에 대한 시인의 회상은 좋은 회상이다. 정든 옛집에 호롱불이 있고 화로가 있으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다. “형제들이 떠들며 다투는” 집안은 적어도 삼대가 한 집에서 사는 곳이다. 계절은 겨울이다. 그러나 춥지 않다. 그때가 춥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살리는 회상 속에서의 그때가 춥지 않다는 말이다. 시인은 현실적인 추위 속에서 옛날의 따뜻함을 그리워한다. 할아버지는 소죽을 끓이시고 할머니는 밤마다 손자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으시고 어머니는 잘 익은 김치를 내오신다. “긴긴 겨울” 밤이면 군것질꺼리를 몰래 가져다 먹는다. 아마 서리라고 하여 남의 과일이나 곡식을 훔쳐 먹는 장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단란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지금의 60대 이상의 세대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험이며 추억일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유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순수회귀에 대한 간절한 소망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순수는 동경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되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순수는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진 것으로서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는 일방통행로를 앞으로만 나아간다. 잃어버린 순수와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시인은 이미 어린 시절의 옛집을 떠나와서 한평생을 살아버렸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시인은 옛집이 있는 그때의 그곳으로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시인은 의연하게 그때로 돌아간다. 자연법칙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심리법칙으로는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몸과 현실은 되돌릴 수 없지만 마음은 그때로 되돌아 갈 수 있다. 형체도 없고 거소도 없는 마음의 위력은 이처럼 대단하다. 마음이 되돌아 갈 수 있는 그때와 그곳을 정신철학에서는 직관시간과 직관공간이라고 한다. 사라진 유년과 잃어버린 순수를 시인은 시작을 통해 생생하게 재생해 낸다. 그리고 시인은 자기가 쓴 시 속에 묻혀 생생하게 유년의 순수를 어루만진다. 나아가 시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또한 이 시 속에서 유년의 순수를 만나도록 해준다. 「그곳에 가렵니다」라는 제목의 바로 위의 시가 그러하다.
5. 고결한 시혼(詩魂)
순수를 지향하는 시혼은 고결하다. 고결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결은 자신의 영혼을 채찍질하여 잠들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자의 긴장에 서려있는 비범함이다.
실패를 감는다
팽팽히 맞잡은 실타래
그대는 당기고 나는 감는다.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느낀다
손끝에서 마음을 느낀다.
당신과 나의 인연과 운명도
이렇게 팽팽히 당겨져야
반짝이는 긴장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 사랑의 교감마저
비로소 더욱 또렷이 전해오지.
실타래 늘어지면 감지 못하듯
우리 사랑도 늘어지면
따뜻한 정감 전할 수 없는 것.
그렇구나, 잠시도 쉬지 말고
늘 팽팽히 당겨 감고 또 감아야지.
더는 버릴 수 없는 연줄
세월도 추억도 함께 감아야지
명월의 슬픈 운명 실패에 당겨 감듯.
 ̄ 「실패감기」 전문
실패에는 실이 감기지만 저절로 감기지는 않는다. 실타래를 잡은 그대가 팽팽히 당겨 주어야만 나는 실패에 단단하게 실을 감을 수 있다. 고결한 시혼이 가질 수밖에 없는 자기 긴장성을 감지한다. 고결한 시혼은 어중간한 처신을 경멸한다. 타협하지 않는다. 밤 깊어가도 잠들 줄 모르고 ‘반짝이는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실타래를 당기는 그대는 시인이 설정한 자기 기준으로서의 당위적 자아이고 실패를 감는 나는 실천하는 자아이다. 두 개의 자아가 긴장을 잃고 느슨하게 풀어지게 되면 마음과 정신 또한 풀려서 인간은 환경에 지배 받는 현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마침내 안일과 나태에 젖어들게 된다. 당위와 현존재의 적당한 타협은 긴장성의 포기이다. 당위적 자아와 실천적 자아(현존재)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게 되면 “밤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말없이도 서로를 느낀다.” 실천적 자아는 당위적 자아가 멀리 있지 않음을 느끼고 당위적 자아는 실천적 자아가 근접하고 있음을 느낀다. “…잠시도 쉬지 말고/늘 팽팽히 당겨 감고 또 감아야지”라고 실천적 자아는 다짐과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된다.
두 개의 자아가 합일했을 때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결과에 대해서는 문면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로지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당위와 현존재가 합일하면 더 이상 당위도 없고 현존재도 없어진다. 다만 새로운 현존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현존재는 곧바로 새로운 당위를 설정하고 새로운 당위와 합일하기 위하여 전진할 것이다. 따라서 당위―현존재의 긴장은 하나의 연쇄를 이루면서 계속해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합일이라는 결과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성을 유지하면서 현존재가 당위를 향해 전진하는 과정에 참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종섭 시인도 이러한 사정을 알았기에 과정만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기에 “더는 버릴 수 없는 연줄/세월도 추억도 함께 감아야지/명월의 슬픈 운명 실패에 당겨 감듯”이라고 하면서 ‘당겨 감는’ 과정적 행위에 방점을 찍으며 시를 마무리 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섭 시혼의 고결성은 시집 곳곳에서 나타난다. “어머니 생전에 가꾸시던” 치자 꽃송이를 바라보며 “환히 마당을 밝혀주는/등불 하나”(「치자꽃」)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영혼은 고결하다. 고결한 자는 위를 바라보는 비범한 눈을 가졌다. 위를 보는 사람에게는 자기 위에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 “문을 닫고 조용히 창밖의 밤/별을 켜서 무욕의 달빛을 들으려 ”(「폐업」)하는 시인은 우러러 볼 수 있는 것 속에서 산다. 높은 것을 끌어내리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낮춤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명예에 대한 개념이 엄격하다. “순수의 본능으로 기어가는/한 마리 딱정벌레”가 되어 “피멍 든 오체투지, 기고 또 기어서”(「설국을 찾아」) 가는 시인의 높은 자존심은 자기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고결을 생명으로 하는 시인은 타인의 명예도 자기와 똑같이 존중한다. 다른 사람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질투 없이 경외한다.
바다와 강이 만나
뜨겁게 부둥켜안는 강구의 봄
아직 꽃망울 벙글지 않고
찬바람과 황사가
쓰린 배, 흐린 눈 훑으며 지나간다.
 ̄ 「강구의 봄」 제3연
김종섭 시인이 오랫동안 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보낸 강구항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강구항의 봄을 묘사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삶의 현장으로 일반화 된다. 바다는 진리의 거대한 품이고 강은 멀리 흘러온 역사이다. 역사가 진리와 만나 “뜨겁게 부둥켜안는”다는 것은 살만한 세상의 원형이다. 그러한 살만한 세상에 봄이 왔다. 이제 춥고 그늘진 곳은 없어지고 천지에 양광이 비치는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 꽃망울 벙글지 않고/찬바람과 황사가/쓰린 배, 흐린 눈 훑으며 지나간다.” 현실의 불완전성을 말함이다. 시인은 어쩌면 완전한 현실은 없다는 사실을 시의 이면에 은근히 배치하고 있기까지 하다.
고결한 시인도 현실에서는 생활인이다. 직장과 사회와 가정에서 잠시만 한눈팔면 자기 자리가 없어진다. 현실은 생존을 위한 전쟁의 장으로 언제나 우리 앞에 마주 서있다. 정체를 모르는 적들이 도처에서 나를 노리고 있다. 누군가가 내 목을 조이고 있다.
누가 내 목을 조이는가
누가 내게 총구를 겨누는가
총알로 마지막 의식을 잠재우고 있는가
 ̄ 「덫에 걸린 멧돼지」 도입부
이 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벼랑 끝을 걷는 현대인의 강박의식과 불안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이 겨울 냉랭한 내 삶의 터전
곳곳에 처 놓은 올무나 덫
나는 어디서 엄동설한을 보낼 것인가
 ̄ 「덫에 걸린 멧돼지」 중반부
삶의 현장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잠시만 방심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몰락하는 수도 있다. 고위층이나 부유층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잠시의 방심으로 파멸하거나 몰락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들 본다. 그러나 인간은 앞에 놓인 상황을 넘어 나가야 한다. 상황을 피해 가거나 뒤돌아 갈 수가 없다. 이때 사람들은 “어디서 엄동설한을 보낼 것인가?”라는 정답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보낼 수밖에 없다.
저돌적으로 저돌적으로
저들의 잔인함을 쓰러뜨려
마지막 생존의 몸부림으로
하나뿐인 영토를 지키고 싶다
 ̄ 「덫에 걸린 멧돼지」 종반부
상황 극복의 강인한 의지를 보이는 대목이다. 저돌(豬突)은 거침없이 내닫는 멧돼지의 돌진이다. 멧돼지처럼 앞뒤 분간 없이 갑작스럽게 내닫더라도 “마지막 생존”을 위해 “하나뿐인 영토를 지”켜야 한다고 시인은 각오를 다진다. 매우 무모하고 대단히 공격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시인의 고결성을 본다. 멧돼지는 잔재주를 부릴 줄을 모른다. 고결한 사람도 잔재간을 싫어한다. 고결한 영혼은 책임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필요에 따라서는 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야만 하는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의 보행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고결이 이와 같은 자기의식을 가질 때 긍지심이 생긴다.
고결한 시혼들은 “저마다 좁은 가슴 속에/탑 한 채씩 지어”(「미탄사 탑」) “얼어붙은 삼동의 푸른 하늘로/멧새 떼 날아오”(「옛집을 찾다」)르는 것을 바라본다.
6. 위대한 시업(詩業)의 길
탈속의 시관을 가지고 순수 서정시를 쓰는 김종섭 시인의 고결한 시혼이 걸어가고 있는 시업의 길은 위대하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아득한 나라를 찾아/잠시 쉬고서 그대 만나러 가는/길은 어디에나 있다는 듯/새들은 끝없이 염송을 되뇐다.”(「다시 미탄사에」) 어디에나 나 있는 길을 따라 시인이 만나러 가는 ‘아득한 나라’의 ‘그대’는 누구인가? 천년 역사가 숨 쉬는 불국토 경주에서 살고 있는 시인 김종섭이 만나고 싶은 ‘그대’는 과연 누구인가?
그땐 내가 왜 보지 못했을까
채널에 잡힌 중세도시의 형상과 색감
그것은 대리석이 아니고, 청동이 아니고
그것은 평면에 도색된 질감이 아니고
노예 같았던 집념의 사내
고뇌의 눈물이었고, 불면의 피땀이었다.
잠들지 않은 영혼의 분말
참으로 본다는 것은
바로 그때, 흥분 속 직시가 아님을
잊혀지려는 시간이 흐른 뒤
문득 동공을 활짝 열고 떠오르는
저 거친 장인의 음성을 붙잡는
한 순간의 영감임을.
내가 어떻게 보든 저만의 모습과 색깔로
시공을 벗어나 당당히 서있다.
어둠 속에 더욱 밝게 비치는
마음으로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을.
 ̄ 「이제야 본」 전문
이 시는 중세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겉만 보고 돌아왔는데 그 후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서 바로 그 도시를 심층 보도하면서 도시 건설에 헌신한 숨은 이름들과 그들의 땀과 정신을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미욱함을 깨닫는 내용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연히도 김종섭이 만나고 싶어 하는 ‘그대’를 만나게 된다.
위대한 시혼은 참으로 본다. “참으로 본다는 것은/……/한 순간의 영감”이라고 김종섭 시인은 말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오해를 이해라고 오해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위대한 시인의 눈은 “한 순간의 영감”으로 고정관념과 편견과 오인의 굳은 껍질을 벗겨낸다. 영감의 능력이란 사물 자체에 참으로 몰두하는 능력이다. 진리는 “시공을 벗어나 당당히 서 있”으며 “마음으로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시혼은 투명한 빛의 영혼과 다르지 않다. 김종섭이 만나고 싶은 그대는 바로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며 영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종섭이 가는 길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진아(眞我)를 찾아가는 길이다.
수정처럼 투명한 빛의 영혼
몽블랑을 오르며
늙은 시인 모리사파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
비워둔 침묵의 공간 속에서
한 마리 새가 텅 빈 하늘로
피어오르는 꽃잎처럼 가볍다.
가을 겨울이나 봄 여름
그 계절이 바뀔 때의 산에 안겨
어지럽고 거칠지 않는 아름다움을
넉넉한 가슴에 담는다,
구겨진 알루미늄과 닳아진 타이어가
뒤덮인 세상에서
한 마리 새가
수 천, 수 만의 실업자보다 낫다는
깊은 산 속 늙은 시인의 목소리는
그대로 영혼을 울리는 시가 된다.
순수의 서정을 밝히는 빛이 된다
 ̄ 「한 마리의 새」 전문
이 시는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쓴 여행시이거나 아니면 문면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시인 모리사파의 생애를 그린 시이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알프스의 깊은 산속에서 사는 늙은 시인 모리사파는 몽블랑을 오르며 “피어오른 꽃잎처럼 가볍”게 텅 빈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를 쳐다본다. 그리고 “구겨진 알미늄과 닳아진 타이어가 뒤덮인 세상에서 한 마리 새가 수 천, 수 만의 실업자보다 낫다”고 말한다.
우선 모리사파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자. “구겨진 알미늄과 닳아진 타이어가 뒤덮인 세상”은 이 명제를 한정하는 말이다. 다른 세상이라면 새와 실업자의 우열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구겨진 알미늄과 닳아진 타이어’는 맹목적 과학의 발전과 가치가 전도된 말기 물질문명의 폐해 및 환경파괴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알미늄과 타이어는 현대과학이 만들어낸 획기적인 성과물이며 생활 곳곳에 파고들어 있는 필수품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통적 인류문화의 근간을 파괴하고 있다. 알미늄은 인간을 경박하게 유용성만 쫓는 동물로 만들었고 타이어의 분진은 인간의 호흡기를 잠식하고 있다. ‘구겨진 알미늄’과 ‘닳아진 타이어’는 알미늄과 타이어의 단점이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현대 물질문명의 폐해 속에서 새 한 마리와 수 천, 수 만의 실업자가 살고 있다. 새는 위를 바라보며 공중을 날면서 살아가지만 실업자는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보면서 엎드려서 살아간다. 실업자는 실업을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으며 설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실업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이다. 새는 이상의 상징이고 실업자는 굴종의 상징이다. 현실에 고개 숙이는 자는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현실을 개조시킬 수 없다. 새는 승리의 상징이고 실업자는 패배의 상징이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이상을 현실사회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자는 단 한 명만 있더라도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 새는 시인의 은유이며 실업자는 맹목적 대중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을 찾아 여행길에 나선 늙은 시인 모리사파가 있고 모리사파의 눈에 비치는 빛의 영혼이 있고 한 마리 새가 있다. ‘한 마리 새가 더 낫다’고 말하는 모리사파의 목소리를 화자는 “영혼을 울리는 시”라고 하고 “순수의 서정을 밝히는 빛”이라고 한다.
김종섭 시인은 요컨대 영혼을 울리는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한 마리 새가 되어 순수의 서정을 밝히는 빛이 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한 마리 새는 ‘시적 진리’ 또는 ‘시인의 진아’로 환치될 수도 있다. 한 편의 시로 읽는 이의 영혼을 울리고 사람들이 잃어버린 순수의 서정을 밝히고자 하는 김종섭의 시업은 위대하다. 환언하면 김종섭은 위대한 것을 위하여 몸 바치고 싶어 한다. 위대한 것에 몸 바칠 수 있음은 실로 영감의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고결을 생래적으로 가진 시인의 영혼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자기를 초월하고 현재사회를 초월한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도 위대한 시혼은 앞서서 외로이 나아간다. 그래서 김종섭 시인은 일체의 협량과 고루함을 거부한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도 자기와 동등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적이면 적이라도 존경을 한다. 외적으로는 위험에 상처를 입지만, 내적으로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7. 에필로그
시집 전체에 걸쳐서 김종섭의 시에는 “그렇구나”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구나’는 깨치는(覺) 소리이며 세계가 확대되는 신호이다. 땅으로 치면 지진이며 하늘로 치면 천둥이다. 그것은 발전의 탄성이며 상승의 자연발생적 구호이다. 저 높은 자유를 향해 가는 자의 반복되는 자기 탈피의 봉홧불 솟는 소리이다. 일흔에 들어서는 시인, 평생에 걸쳐 시업을 닦으며 살아온 사람, 이 나라 중량급 시인이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구나!’ 위대한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꾸 발전해 가는 것이구나. 지축을 울리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위대한 시인의 발자국 소리의 또 다른 이름이 ‘그렇구나’라는 것을 필자도 이제야 깨닫는다. 위대한 예술은 위대한 깨침에서 출발한다. 위대한 자는 발전하고 발전하는 자는 위대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섭 시인은 위대하다. 시도, 사람도, 정신도 그러하다.
“누구보다 시인다운 자유인의 모습으로 걸어온 여정”이나 “금강역사의 모습을 빼닮은 천생 신라인의 얼굴”(「코끼리 걸음으로」)은 김종섭 시인이 김해석 시인을 노래한 구절들이지만 필자가 보기로는 김종섭 시인, 바로 당신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음을 진언하고 싶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인간은 그가 가진 자유에 대한 의식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탈속의 시인이여! 자유로이 가는 시업으로 성불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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