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단상·기사/[時論 · 斷想] 世上萬事

[시론] 자살률 1위 - 외면하는 한국사회 / 김주완

김주완 2011. 4. 12. 07:46

자살률 1위 - 외면하는 한국사회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병리적인 문제


맹목적 무한경쟁의 끝은 자살?


꼴찌도 인간인데…,


제로섬게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람 잡는 실적주의와 실용주의에서

본원주의, 인간주의로의 회귀 필요



화신花信이 북상하고 봄꽃 축제가 곳곳에서 열리는 희망의 계절, 봄이다. 그러나 이 좋은 계절과는 상반되게 우울하고 답답한 소식들이 자꾸 들린다. KAIST 학생들과 교수의 잇따른 자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지방 5급 공무원의 자살 등 일련의 최근 사태들은 4월을 잔인한 달로 만들고 있다. 지금 이 시간도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혼자서 고뇌하고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자살은 전 방위적이고 전 계층적이다. 청소년에서 노인층까지, 노동자ㆍ학생ㆍ군인ㆍ회사원ㆍ농민ㆍ상인 등 소시민에서부터 연예인이나 재벌가의 사람들은 물론 사회적 지도층인 교수ㆍ법조인ㆍ전직 대통령까지 자살하는 실정이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러다가 자살천국이라는 낙인이 우리 사회에 찍혀질지도 모르겠다.


자살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이자 심각한 사회병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아니면 기껏 그가 속한 집단의 문제로 취급함으로써 문제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고 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자살은 KAIST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지향성이나 패러다임의 문제가 개인의 자살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자살은 일견 지극히 개인적 문제로 보이면서도 사실은 병들어 있는 사회 전체가 만든 문제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심화된다. 가치 지향의 방향성과 사회적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한 자살은 끊이지 않고 반복될 것이다.


자살의 이유야 나름대로 다를 수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경쟁이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경쟁에는 권력의 지향이나 횡포 또한 한 몫을 더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깊은 검토나 합의도 없이 ‘무한경쟁’이라는 말이 어느 날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것이 고착화 되고 말았다. 모두가 무한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도, 시장이나 정치권에서도 모두가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교사는 교사끼리, 학생은 학생끼리, 상인은 상인끼리,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과 집단 사이, 단체와 단체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한경쟁은 이제 우리 사회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이보다 더 살벌한 말도 흔치 않을 것 같다. 경쟁의 본질은 일정한 룰과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있다. 달리기에도 단거리와 장거리라는 종목이 있으며 장거리 경기인 마라톤의 경우에도 42.195km라는 제한된 거리가 있다. 인간의 체력적 한계를 염두에 둔 거리이다. 그리고 승부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와 완주에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런데 끝없이 달리고 또 달리라고 한다면 주자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바로 이와 같이 제한된 거리가 없이 끝없이 달리는 것이 무한 경쟁이다. 무한 경쟁은 참가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생존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수많은 탈락자들이 양산되어야 하고 끝까지 살아남을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다. 말 그대로 경쟁의 끝 지점이 없는 무한 경쟁이라면 끝까지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한 경쟁의 끝은 공멸이다. 먼저인가 늦게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탈락해야 하는 것이 무한 경쟁이다.


우리 사회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또 하나의 괴물은 실적주의ㆍ성과주의이다.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실적을 내느냐에 따라 차등적인 성과급을 준다. 과정이나 사정은 전적으로 무시된다. 어떻게든 많은 실적만 내라고 사람들은 내몰리고 있다. 인센티브 부여라는 당근으로 일등 지상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채찍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당근도 사람을 죽인다. 성취감의 이면에 있는 것이 상실감이고 모멸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일등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일등이 될 수는 없다. 꼴찌라고 해서 인격이나 자존심 또는 자긍심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꼴찌 없는 일등 없고 영원한 꼴찌도 없다. 이러한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애써 이 점을 외면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취급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자동차도 쉬지 않고 달리면 엔진과열로 화재가 난다. 나사못도 끝없이 조이기만 하면 망가져서 못쓰게 된다. 하물며 기계가 아닌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위험한 경기일수록 선수의 안전과 보호를 가장 우선시 한다. 보호 장구가 있고 엄격한 룰이 있고 제한된 시간이 있다. 반드시 휴식시간을 둔다. 선수가 위험에 처하면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치르고 있는 무한경쟁과 실적주의는 맹목적이다. 투입과 산출의 생산구조에서 무조건 산출의 양을 더 크고 많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생산성을 아무리 확대한들 생산자의 인간적 삶이 무너져야 한다면 그것은 제로섬게임밖에 안 된다. 이득과 손실의 총합이 제로가 되는 이러한 게임을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하여 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여전히 실적주의와 무한 경쟁이라는 괴물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사람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막무가내로 달리고만 있다. 이를 제어할 심판이 없다. 주심도 없고 부심도 없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청맹과니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무한경쟁과 실적주의는 한결같이 실용주의적 사고에서 발원한 것이다. 지금 내게 유용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용한 것은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실용주의의 입장이다. 실용주의는 본원주의나 인간주의와는 정반대편에 서 있다. 모든 것을 효용가치로만 판단한다. 실용주의가 극단화 되면 병든 가족이나 부모는 버려야 하고 손해가 되는 약속은 지키지 않아야 하며 거추장스러운 자존심이나 인격은 헌신짝처럼 버려야 한다는 논리로 비약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처한 제로섬게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람 잡는 실적주의와 실용주의에서 본원주의와 인간주의로의 회귀가 필요하다. 무한 경쟁이라는 괴물을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야 한다. 기계적 인간관을 타파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다. 꼴찌도 인간이다. 자기존엄이 유지될 때만 인간은 삶의 의미와 의욕을 가질 수 있다. 사랑과 휴식과 보람이 있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는 것이지, 공부와 노동의 도구가 되고 수단이 되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죽음으로 내모는 노예적 삶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사회 ― 이것이 우리의 지상목표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와 권력자, 가진 자가 직시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현실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야만 대책이나 대안이 나올 수 있다.


자살에 대한 책임을 죽은 자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산 자가 져야 한다. 병든 사회의 희생양이 된 그들에게 남아있는 우리가 속죄해야 한다. 실적주의, 성과주의, 무한경쟁, 경제제일주의라는 사회적 패러다임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거나 더 이상 따라가서는 안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 맹목적 성장 보다는 합리적 분배가 우선시 되는 사회, 물질 보다 정신을 상위에 두어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본래적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