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강 인문학 잔치 제2강]
2023.05.21.(일) 14:30~16:00/낙동강문학관 강당
시적 혹은 사회학적 상상력으로서 아나키즘:하나의 마음세계
-허유 하기락 선생을 기리며
김성국(부산대 명예교수, 아나키스트 허유 하기락 기념사업회)
인사 및 강사 소개(박찬선 낙동강문학관장)
“시적 혹은 사회학적 상상력으로서 아나키즘: 하나의 마음세계”
-허유(虛有) 하기락 선생을 기리며
김성국 (부산대 명예교수, 아나키스트 허유 하기락 기념사업회)
“벌판에는 바람이”
(김주완, 1990년 3월 1일 작시, 1998년 2월 철학연구 추모특집 재게)
벌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뜬 구름이 몰려다니고 있어요
소리의 물줄기가 어지러이 흐르고
몸과 몸을 부딪혀 맹목의 수목들이
사생결단을 하고 있어요.
갈대밭에서 나온 미풍이 숨죽여 자진하고
부서지는 흙들의 노래가
산을 옮겨가고 있어요.
쓰러지는 풀들은 쓰러지는 슬기로
바람을 피하고
온전한 뿌리를 지키고 있어요.
벌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번뜩이는 눈물이 공중을 떠 다녀요.
자꾸 서두르고 있어요.
바다인 듯한 바다가 정작은
바다가 아니어요.
시인은 말한다.
“영원한 자유인 하기락은 가고, 하기락이 그처럼 간구했던 ”인간의 해방“과 ”실존의 자유“는 이제 후세대의 과제로 남겨졌다. 20세기가 끝나 가는 지금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벌판에는 아직 바람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김주완, 1998: 46).
시간은 흘러 이제 21세기 2023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황량한 바람은 불고 있다. 나에게는 더욱 음산하고 구슬프게 들린다. 벌판에는 온통 하늘과 땅을 가리는 아파트가 바빌론의 오만한 탑처럼 솟아 있다. 바람은 혼탁한 공기를 몰고와 내일의 자식들을 질식시키기에 음산하고, “원래의 나 바람은 이런 바람이 아니었다”고 항변하는 이 바람의 소리는 애처로울 뿐이다.
그때 1998년, 나도 시인의 바람 소리를 함께 들었는지, 이제 그대의 껍질을 깨고 그것을 해방시켜라, 그대가 아나키스트요, 자주인이라면 그대 자신부터 창조적으로 파괴하라”며 “존재의 부름”(하이데거)을 받고, “한 층 더 높은 결정”(하르트만)을 찾은 자유와 해방의 선구자(하기락)를 따르리라 결심하였다. 하, 하, 하. 천하의 삼하가 모였으니 필히 하늘을 이루어 영원히 우리를 인도하고 있으리.
오늘, 다시 25년이 지난 2023년, 나는 그 하늘 가까이 가보고자 [하나논리]를 만들었다. 하나와 하늘은 상통한다. 하기락의 순수를 존경하여 나는 잡(종화)속에서나마 하나를 향한 순잡(純雜) 혹은 잡순(雜純)을 발견하고 싶다. 순일(純一)과 잡일(雜一)이 하나 가운데서 통일(通一)을 이루고 있음을 보고 싶다.
이 자리의 발제를 위하여 김주완의 글, “하기락과 자유”를 네 번째 읽었다. 읽을 때마다 느꼈지만, 감히 내가 허유 선생의 아나키즘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다. 이번에는 특히 심하다. “하기락은 철학자로서 아나키스트였지 아나키스트로서 철학자는 아니었다”는 그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간 나는 하룻강아지처럼 덤벼든 꼴이다.
0/1. “살아 있는 시인의 사회”: 문언일심(文言一心) 시대의 박찬선과 김주완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연유는 허유 선생을 위하여 그의 수제자 (대한철학회의) 김주완이 가교를 만들고 낙동강 문학관 박찬선 관장이 개통을 하였기 때문이다. 시와 철학, 아나키즘과 사회학이 서로 연결되는 드물고도 소중한 자리인 만큼 기쁘면서도 두렵다. 어설프나마 “상상력‘이라는 화두로 우리의 끈 혹은 인연을 맺어 보겠다.
챗GPT가 일반인의 관심을 끈 이후 관련 업계에서는 구글의 ‘Bard’, 아마존의 ‘Bedrock’, 중국 바이두의 ‘文心一言’이나 알리바바의 ‘通義千問’을 포함하여 각종 AI 관련 프로그램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예술가 시인, 지식인 철학자와 사회학자는 이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야 할까?
주지하듯, 이미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의 위력은 예술 영역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에 대한 찬반 우열의 시비를 비롯하여 인공지능의 한계성과 인간지능의 지속적 고도화, 혹은 인간의 무력화(실직과 정체성 혼란)와 인간의 자유해방 고양(신직종 창출과 여가시간의 증대) 등이 거론된다.
이와 같은 사태는 이미 40여 년 전 정보혁명이라는 소위 제 3의 물결이 온 세상을 휩쓸기 시작할 무렵에도 발생하였다. 아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초 산업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한편으로는 러다이트와 같은 기계파괴운동의 저항이 있었던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적 질곡과 대대손손의 계급적 빈곤을 타파하는 유일한 희망으로 공장노동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정든 시골 고향을 떠나 공순이/공돌이로 도시의 주변부로 옮겨온 우리의 부모 형제를 한없이 슬피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의 무심한 혹은 필연적 운행에 승차할 수밖에 없던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찾았던 고달픈 시대의 가난한 도전자이었던가? 누가 이 천지불인이요, 모순과 비합리 투성이요 예측불허의 역사를 단칼로 정리하리오.
역사는 무심히 흐른다. 세상도 별로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은 아우성을 지른다.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압박감과 스트레스 속에서 나를 꺼내 달라고(Under Pressure...Let me out!). 유일한 희망 혹은 저주는 자유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주받은 자유를 희망의 자유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각자도생이다.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는 내가 도울 대상이다. 물론 서로 협력하는 상호부조의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내 문제는 내가 처리한다는 기본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아나키스트 자유인, 자신이 자신의 주인되는 자주인의 자세이다.
다만 그대 자유의 길을 걸으며 반자유의 유혹이나 샛길에 빠지지 말라.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쉽게 말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도록 노력하라. 특히 약자를 강제하지 말라. 강제는 폭력이고, 폭력은 자유의 적, 반자유이다.
노자는 무위자연을 설하였다. 인위적인 것, 억지로 강제하거나 꾸미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런데 영어로 예술은 ”art(技藝)“ 이다. 자연에 대비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기술적 활동을 말한다. 문학을 예로 들어 얘기하자면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정교한 혹은 특수한 언어게임이라는 점에서 인위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인위는 일상적 의미의 작위나 강제 혹은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기성적인 것, 기존의 권위를 폭로하고, 조롱한다는 점에서 폭력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창조적 파괴이다.
이상의 다소 거치르고 단순한 전제를 기준으로 삼으면, 인위의 산물인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 혹은 문학가들은 인공지능을 이단으로 부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 둘 다 멋지게 최고의 인위적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가?
여기서 나는 과연 노자의 무위자연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가? 감히, 이 점에서 노자를 넘어서 보자. 보다 겸손한 표현으로 노자를 새롭게 바라보자. 인위와 자연은 영원히 소통 불가능한 철천지 원수 같은 사이인가? 천지불인을 말한 노자가 이 현실 세상의 질곡과 속박을 모를리 있었겠는가? 인위적-강제적 유위가 세상과 시대를 짖누르고 있기에 이를 개선하자면 그 반대 방향인 무위자연의 가치를 내세워 최소한 균형이라도 얻어 보고자 최소국가, 반전부쟁(反戰不爭),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낙기속(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의 일상적 즐거움 등을 강조한 것이리다. 무위가 있어야 유위가 유효하고, 유위가 있어야 무위를 무한 가치로 우르러 보게 된다. 노자는 유위 = 절대악, 무위 = 절대선이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유위의 무위화와 무위의 유위화(無爲而無不爲)라는 역설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위와 무위의 통일성을 알려 주고자 하지 않았을까?
인공지능을 우리 편으로 만들자.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이윤 확대의 논리에 따라 인공지능이 기득권 세력의 새로운 지배 도구가 되지 않도록 눈을 바로 뜨자. 어떻게? 정보혁명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이 감시와 조작, 상품화와 최면술로 변용되는 현실을 보라. 유일한 방법은 인공지능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친구로, 동반자로, 조력자로 그리고 나의 분신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단순히 성능 좋은 소모성 도구로만 취급한다면 언젠가는 생태적 파괴에 대한 자연의 복수처럼, 기계의 반란에 직면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인류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사랑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기계를 사랑하면 기계도 감읍할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어떤 상상력의 소산인가?
1. 시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상상력의 결합
모든 예술의 생명력 혹은 가치는 상상력에 있다. 상상력은 그 자체 이미 창조적이다. 기존 현실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이미 창조성을 지닌다. 여기서 나는 특히 시적 상상력을 대상으로 말하고 싶다. 언어의 한계 혹은 言語道斷을 돌파하여 言語道通을 구하는 시인의 상상력!
과거에는 거의 모든 (식자로서) 지식인은 시를 즐겼으며, 시를 지을 수 있었고, 시작을 삶의 도리를 찾는 과제이자 흥 혹은 풍류도로 간주하였다. 아,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우리 한국 고유의 풍류도 정신이여! 어떤 시인은 이념적으로 선가의 맥락과 닿아 있는 동학의 정신을 탐구하고, 어떤 시인은 철학적으로 실존의 본질을 탐색하지만, 이들은 모두 풍류라는 상상력이 뒷받침된 멋과 흥을 구한다. 시인 본연의 길을 간다. 상상력은 항상 현실적이다. 그것은 너무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혹은 참으로 현실적이기 때문에 현실에 매몰된 사람들의 눈에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현실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위대한 상상력은 항시 현실의 무명과 미혹 그리고 부패를 밝히는 빛이요 소금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 모두가 아끼는 꿈과 비전이 바로 상상력의 산물이다.
시적 상상력을 아나키스트 베이(Hakim Bey)는 시적 테러리즘(Poetic Terrorism)이라는 멋진 용어를 사용하면서 창조적 파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유토피아를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각고의 인내로써 이룩하려는 시도 또한 존경스러운 일이지만, 순간순간 여기저기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즐기고 체험하는 일상적 혁명의 직접주의(immediatism) 또한 자유와 해방에 목마른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유효한 방안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찰나에서 영겁으로. 일일우일신의 지혜와 즐거움이다.
거의 모든 사회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삼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가지 개념이 있으니, 바로 밀스(C. Wright 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이다. 당대의 개념과 개념으로 추상적 사상누각을 세운 공리공담성 거대이론을 비판하고 이와 동시에 과학적 실증주의라는 미명 아래 미시적 현상 분석에 매몰되던 오도된 구체성(misguided concreteness)을 비판한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격렬히 비판하고(Listen Yankees!), 민주주의 사회라는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층(Power Elite)을 분석하여 이들의 조직화된 무책임성(Organized Irresponsibility)을 폭로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의 수제자인 신사회학(New Sociology)의 저자, 호로비츠(Horowitz)에 의하면, 밀스는 죽기 직전 아나키즘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밀스에 대한 전세계 사회학도의 열정적 존경심을 고려할 때, 아나키즘이 사회학의 핵심적 주요 이념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이 또한 미완의 이념 아나키즘을 위해 기다림을 준비하라는 계시이리라.
시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상상력은 현실사회를 포용하면서도 초월하려는 통일성을 공유한다. 마찬가지로 박찬선, 김주완 시인과 김성국 또한 시적-사회학적 상상력을 매개로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삼자 대면하지만, 하나논리의 특성인 삼일논리에 의해서 서로가 화쟁 일심(和諍 一心)으로 하나를 이루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아나키스트 허유의 재인식
나는 뒤늦게 1989년 무렵 아나키즘에 매료되어, 어렵사리 3년간 독학 후, 당대 최고의 아나키스트 이론가이자 초지일관 실행가로 알려진 허유 선생의 처소를 찾아 대구에 갔다. 실제 배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문하생으로 입문을 자청한 셈이다. 이후 나는 허유 선생을 이념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첫 방문에서 나눈 대화와 대구 아나키즘연구회 회원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신 그 인간적 배려와 깊이에 크게 감명하였다. 동시에 그야말로 서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좁은 공간의 서재에 참으로 놀랐다. 허유 선생 특유의 근검절제 외허내유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허름한 배낭을 매고, 지하철을 타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는 풍류를 아는 대장부이었다. 형형한 눈빛이 사무치게 그립다.
허유 선생의 아나키즘과 철학에 관해서는 김주완 선생을 비롯하여 대한철학회 소속 여러 선생님들의 연구를 통해서 이미 충분하게 그 진면목이, 일차적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김주완 선생께서 규정한 대로 실존의 자유와 인간해방이 허유 아나키즘의 정수이다. 여기에 더 부쳐 나는 자주인(自主人)이라는 구체적 인간상을 강조하고 싶다. 실제로 허유 선생은 “한국 자주인연맹”이라는 아나키스트 단체를 오랜 기간 이끌었다.
나는 여기서 허유 선생이 서구형 아나키즘을 일면 수용하면서도 과감하게 한국형 아나키즘을 개척한 측면에 주목한다. 조선의 위대한 아나키스트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일찍이 “아나키즘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아나키즘”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서구에서 들어온 아나키즘을 무슨 금과옥조로 간주하여 그것을 숭배하고 거기에 맹종하여 서구 아나키즘을 추종하는 조선의 아나키스트가 되지 말고, 조선 아나키스트는 서구 아나키즘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적실하게 변용시켜, 독자적으로 재구성하는 주체적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경고이다. 민족을 끔찍이도 사랑한 단재였지만 “조선혁명선언”을 통하여 이제 우리 조선 민족은 민중혁명을 통하여 주체적-혁명적 민중으로 성숙할 것을 요구하였다.
허유 선생 또한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 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고, 민족의 성숙한 모습으로서 민중을 상정하고, 민중의 근원적 바탕으로서 민족을 위치시키는 상생의 논리를 구사하셨다. 서구의 반정치주의 혹은 반국가주의를 표방하는 순정 아나키즘(pure anarchism)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서 아나키스트들의 임시정부 참여를 옹호하고, 단주 유림 선생과 함께 해방 후에는 독립노농당 창당에 적극 참여하였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양일동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고 정책위의장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허유 선생의 정치활동은 동양식으로는 지행합일의 표출이지만, 아니키즘 고유의 원리인 직접행동(Direct Action: One action deserves much more than thousand words) 논리에 충실한 것이다.
허유 선생의 끊임없는 현실참여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학자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아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참여가 학자로서 그의 공부를 더욱 성숙시키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결실의 하나가 [조선철학사]이다.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다. 물론 책 내용이 조선시대까지로 국한되고 있지만, 조선이라는 말은 고조선을 연상시키는 효과를 통해 우리 역사의 뿌리를 제대로 인식해야 하다는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의 선견지명을 들어보자.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흔히 반만년이라 하고, 육천년이라고도 하는데 저자는 대략 만년이 된다고 본다...비록 충분한 고증을 거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전하여지는 문헌이 그렇게 보고 있다. 내 나라 역사를 억지로 길게 잡자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길다는 것이 반드시 그 나라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고증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현존 소전의 문헌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굳이 깎아 내려서 짧게 잡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명쾌한 판단이다. 아직도 환단고기나 천부경에 대한 위서논쟁이 가시지 않는 역사학계의 낡고 반동적인 고증주의 집착에 어이가 없다. 역사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신화이다. 과거는 구전되거나 구술된 온갖 형식의 기록들이라는 실증적 차원도 갖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결코 정확히 혹은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무지, 부지, 미지의 세계인) 과거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기억이요, 추억이요, 현실이 아닌 비현실로서 신화적(mystic or mysterious) 성격을 갖는다. 부정확하거나 허위의 기록들이 얼마나 많은가.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조선에 관한 언급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나는 천부경(天符經)을 허유 선생이 하사한 [조선철학사]를 읽으며 처음 접했다. 그 책은 여기저기 여러 차례 읽었고, 천부경 부분은 수십 번 읽고 또 읽었다. 오늘날에야 선생께서 왜 우주탄생과 상고사를 그토록 열심히 길게 서술하였는지 그 의중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요즈음 강조하는 “인식의 우주론적 전환”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었던가? 한국철학회라는 이름에 비하여 대한철학회라는 명칭 자체 또한 훨씬 웅혼장쾌하게 들린다. 환국-배달-고조선-부여-고구려의 광활한 기상이 느껴진다.
[조선철학사]에서 허유 선생은 특히 화담의 기철학을 중시하여 “화담철학”이라는 고유 명사를 부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화담철학과 천부경을 연관시키며, 천부경의 철학 원리로서 근원적 가치와 잠재력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허유 선생은 천부경의 원리를 동아시아 지혜의 선구적 기반 혹은 근거로서 명백히 인식하였다. 나는 그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수준이었지만, 어렴풋 하게나마 그 심오한 가치를 감지하여, 2003년 한국사회학회 회장취임 논문(“탈근대 아나키스트 사회이론의 모색”)의 말미에 천부경의 세 구절(一始無始一,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을 인용하였다. 왜 허유선생은 아나키스트이면서 조선철학사에 관심을 집중하였을까? 신채호가 강조해 마지 않았던 아나키즘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아나키즘을 찾았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현실을 바탕으로 조선인이라는 주체성을 가지고, 비록 서구에서 유입된 아나키즘이지만 그것을 조선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창조한다는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유는 그의 아나키즘에서 공산주의적-국가주의적-관료주의적-반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과감히 비판하면서, 계급투쟁적 평등논리를 최고 가치로 삼지 않았다. 실존의 자유와 인간해방이 최고최선의 목표이다. 이를 나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이라는 표현으로 살짝 바꾸었다. 평등을 자유의 하위 개념 혹은 구성 개념으로 간주한다. 동아시아의 맑시스트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가치법칙에 따라서, 평등의 等을 거의 “(똑) 같음”이라고만 해석한다. 차라리 조소앙처럼 삼균주의의 균이 더 적실한 것 같다. 주역 계사전을 보면, 道有變動 故曰爻, 爻有等 故曰物, 物相雜 故曰文, 文不當 故吉凶生焉“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 등은 (각각의 자질/속성에 따른 나름의) 등급/특성/개체성/차이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물질주의적 서구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평등을 ”너도 나도 같음“이라는 동질화된 혹은 획일적 개념으로 수용하지 말고, 너와 나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차이에 대한 평화로운 존중“으로 이해하는 인식적 전환이 필요하다.
3. 하나논리와 유아유심의 마음 세계: 허유 아나키즘의 계승
나는 2015년, 일찍이 냉전시대의 심화를 목격하면서 칼 포퍼(Karl Popper)가 내놓은 [개방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테제를 21세기 현실에 걸맞도록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 책에서 허유 선생과 영국의 위대한 아나키스트 콜린 워드(Colin Ward)를 내 아나키즘의 양대 뿌리로 삼으며 ”자유주의의 급진화와 아나키즘의 실용화“를 동시에 이룩한다는 의미에서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를 도출하였다.
나아가 단재와 허유를 따라서 조선의 아나키즘 혹은 아나키즘의 한국화를 추구하던 나는, 이와 동시에 한국의 사회학자로서 세계적 차원에서 적용 가능한 토착적 사회이론의 수립이라는 과제를 또한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양대 목표를 동시에 수립할 수 있는 이론적 작업에 다시 집중하였다. 그 결실이 지난 3월에 나온 [하나논리: 동아시아 사회이론의 모색]이다. 하나논리는 허유 선생이 소개한 천부경을 기반으로 출발한다. 허유 선생의 관점을 더욱 확대하여, 하나의 본체론적 성격을 태허일기(太虛暱氣)로만 한정하지 않고, 리기심(理氣心) 혼연일체의 ”하나“로 간주하고, 불가의 일체유심조, 천부경의 본심본태양, 양명의 심즉리 그리고 조선의 리기논쟁을 참고하여 심 주도의 리기심일원론을 제시한다. (천부경의) 인중천지일을 유아유심 개인주의의 핵심으로 해석하고, 중도/중용 혹은 중일의 가치를 사랑(대자대비, 인, 홍익인간, 수선리만물이부쟁)의 실행 원리로 삼는다.
허유 선생과 나의 아나키즘은 하나논리의 어디에 깔려 있나?
이 책에서 나는 아나키즘의 최고 가치인 자유와 해방을 동아시아 지혜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과 연결시킨다. 어떻게? 서방에서는 ”진리가 혹은 주님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깨달으면 구애받지 않고, 편안하며, 자유로와 진다“고 한다. 깨달음이란 바로 어떤 진리를 체감하며 터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음과 자유해방의 (마음) 세계를 자연스럽게 아니 필연적으로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다. 나아가 그 역도 사실이 될 수 있을까? 내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우면 나는 깨달은(혹은 깨달음을 얻은) 상태인가? 토론의 여지가 많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나는 역도 사실이 될 수 있다는 후자의 관점을 취한다.
그래서 나는 안빈낙도, 안분지족, 안심입명을 토대로 하는 안락주의를 깨달음의 현실적 양태로 제시한다. 깨달았는데도 삶이 무미건조하고, 그저 그런 무덤덤의 삶이 계속된다면 누가 깨달음의 길로 가고자 하겠는가? 너무 세속적-실용적 관점인가? 깨달음의 의미와 가치를 종교적 금욕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 깨달음을 (극소수의 득도 고승들이 체험한) 장기간의 지난한 고행과 인내의 결실로서만 규정해서는 안된다. 각인은 각자의 깨달음을 필요로 한다. 고승의 득도와 범인의 깨달음이 같을 수도 없고, 같을 필요도 없다. 여기에 어떤 우열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덜 깨달은 자의 우매한 소치가 될 뿐이다. 깨달음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는 동일한 것이다.
그야말로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각자는 자신을 위한 깨달음의 왕국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면 된다. 깨달음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이 하나의 질곡이 되어 우리를 강제해서는 안된다. 불가에서 경고하는 空空三昧 타령이라는 空病에 빠질 수 있다. 중생구제 한다고 설치고 다닐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처처시시의 일상적 깨달음 혹은 깨달음의 일상화로서 매일매일을 새롭게 시작하며 안락을 즐기는 삶이다. 하루를 백년처럼 살아가는 하루살이 인생이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하고 기대할 수 있는 고중락(苦中樂)의 삶이다. 그 즐거움은 단순한 향락적 쾌락이라기보다는 상쾌하고 안전한 즐거움이라는 의미에서 안락이다. 도인이나 신선처럼 유유자적 소유유하면서 즐기는 인생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강제, 강요, 간섭 당하며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자주인이다. 내 자신이 나의 주인이라는 주체성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릴 때부터 부모, 교육, 친지 등에 의한 사회화(socialization))의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순응적, 동조적, 타율적, 반주체적 성격의 인간으로 길들여 진다. 특히 오늘날의 잘못된 퍼주기 복지사회는 인간을 피동적이고 비주체적인 물질화된 존재로 전락시킬 수 있다. 청빈의 가치는 이제 공염불이 되고 있다. 허유의 청빈이여!
우리는 흔히 사회문제를 얘기하는데 사회문제의 핵심이자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문제이다. 인간의 타락과 부패, 탐욕과 사악성에 의해서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 사회문제이다. 물론 소수 기득권자를 위한 법과 같은 사회제도의 구조적 결함이 사회문제를 지속, 증가, 악화시키는 온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폭력의 집결체라고도 할 수 있는 국가 권력체계가 그 구성원인 개개 인간을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 대신에 각종 비리와 부정으로 몰고 가는 온상을 제공하는 셈이다. 결국, 근원적 차원에서 볼 때, 인간(성)의 개조 없이 사회의 개선은 불가능하다. 자유인 혹은 자주인으로 인간을 키워야 한다.
굳이 허유 선생의 아나키즘에 내가 새로운 내용을 부가한 것을 지적하라면 ”사랑“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비(사랑의 슬픔?)의 문제이다. 동서양에 걸쳐 사랑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무이의 길이다. 기독교의 사랑, 측은지심으로서 유가의 인, 무위자연으로서 도가(도덕경 67장의) 慈(혹은 8장의 水善利萬物而不爭), 불가의 중생구제를 향한 대자대비, 선가의 만인사랑으로서 홍익인간을 상기해 보라. 사랑은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가장 직접적이고도 확실하게 효과를 제공한다. 사랑의 슬픔으로서 자비는 참으로 현묘하다. 이에 더하여 하나논리는 중일을 강조한다. 불가의 중도중관 및 유가의 중용지도가 가르치는 모든 이론과 실천의 묘로서 중일을 강조한다. 화이부동과 과유불급의 지혜로서 중일을 이해하고 싶다.
하나논리가 동서문명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상극보다는 상생이 주를 이루는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결국 천지인합일이라는 깨달음은 내 자신이 바로 하나의 마음 세계요 우주의 마음이 되는 일심(一心)이라는 사실을 지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동아시아의 신비주의, 허무주의, 비관/체념주의, 탈물질적 유아유심주의 등에 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통상 신비주의의 반대는 과학(적 합리)주의라고 간주한다. 도대체 과학(science)은 무엇이고 합리(rationality는 무엇인가? 자연과학만이 결코 과학을 독점하거나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자연과학이 인간의 신체와 의식, 자연 현상의 신비를 파헤쳤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범위와 깊이가 얼마나 되고, 그것의 정확성과 신뢰성은 또 어느 정도가 될까? 단언컨대, 과학은 여전히 오리무중과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과학을 새로운 신이 등장한 것처럼 떠받들며 숭배한다. 인간의 지식이란 무지와 부지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서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모든 것을 알았노라 기고만장하는 것만 같다. 천차만별이요 각양각색인 인간들, 예측불허요 무궁무진의 자연 현상 앞에서 인간의 합리적, 과학적 사고는 거의 무용지물이 아닌가? 코로나 앞에 그 무력과 한계를 철저히 드러낸 첨단 의료과학, 우주의 신비를 풀었다는 항공우주과학의 가소로운 허장성세, 자연의 생태적 복수 혹은 자기조직성을 과소평가한 대부분의 첨단 지구개발용 과학기술 등등 그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서구의 과학은 한때 동양을 마술과 주술, 미혹과 미신이 지배하는 음울한 신비주의의 세계에 빠져있다며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오리엔탈리즘에 덩달아 춤을 춘 동양의 일부 학자들.
우리는 모두 길을 찾아 길을 걷는다.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걷는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걷는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옛 사람들이 인생을 “길을 찾는다”는 구도에 비유하였는가? 마침내 나름의 길을 찾았다는 득도(得道)를 삶의 최고 목표이자 최대 기쁨으로 삼았는가?
다시 한번 강조하자.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길 찾기로서의 깨달음이 점차 고난과 금욕으로 점철된 장기간의 고행과 동일시되고, 오직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는 지난의 과제로 간주된다. 종교의 신성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탈세속화의 산물이었을까? 기름진 음식과 감미로운 술을 금지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침묵 속에서만 깨우칠 수 있는 깨달음은 정녕 보통 사람이 넘보기는 힘들다.
깨달음은 사소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욕심이나 화를 덜 내기, 모든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기,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결례하지 말기, 먼저 내 자신과 내 가족부터 사랑하고 도우기, 등등의 적선적덕하는 일상생활로부터 더 나은 삶을 위한 깨달음은 시작된다. 시작이 반이고 티끌 모아 태산이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다. 천천히 꾸준히 깨달음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너도 나도 수시로 구도의 길에서 각인 각색의 깨달음을 얻는 득도자가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즐기자. 평안하고 안전하게 즐기는 안락주의!
이제 끝을 맺자.
아나키즘은 당분간 이 엄혹하고 강고한 현실에서, 김춘수 시인의 노래(허유 선생의 토르소),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피지 않는다”처럼, 결실을 맺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상상력에 사회학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내 마음의 세계 속에서 아나키즘을 꽃 피울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니다. 유아유심론자로서 나는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다. 내 마음의 세계에서는, 그 대상이 현실적인 것이 건, 비현실적인 것이 건, 모두 실재한다. 그리고 이 유심적 실재를 확고히 믿는 사람만이 현실의 경험세계에서도 그 가능성을 흔들리지 않고 개척한다.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 풍요로운 대지를 가꿀 수 있다. 정신의 힘, 마음의 마술은 오직 상상력을 통해서 작동한다.
상상력은 사람을 사람답게 키워 줄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세계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람 속에 살아 있습니다(人乃天).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우리도 사람입니다”(박찬선 시집, 2016)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의 신이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적 상상력은 상상적 신을 현실에서 찾아내어 우리와 동행시킵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을 모시는 신인”(상기 박찬선 시집에 대한 김주완의 해설에서 인용)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논리에서 하나는 天地人合一로서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는 인간이 中을 취하면 천지와 하나가 되기(人中天地一) 때문에, 바로 이 경지가 신인합일의 道通이요, 得道요 깨달음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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