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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제3시집,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김주완 2016. 5. 30. 17:37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김인숙 시집

시인동네 시인선 56

김인숙 지음 | 시인동네 | 2016년 05월 27일 출간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시인동네 시인선 056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월간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신라문학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농어촌문학상〉 대상, 〈경북작가상〉 등을 수상하며 넓고도 깊은 서정의 빛깔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 온 김인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아름다운 것이 소멸한 혹은 아름다운 것을 상실한 이 시대에 아름다운 것을 찾아가는 이번 시집은, 아름다운 것의 불멸성에 대한 김인숙의 찬가이며, 그 자체로서 숭고한 빛을 뿜어낸다.


저자소개

저자 : 김인숙

저자 김인숙은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꼬리』 『소금을 꾸러갔다』가 있다. 〈신라문학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농어촌문학상〉 대상, 〈경북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현재 경북문인협회 사무국장, 구상문학관 시동인〈언령〉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의 말

많은 별들이
도시의 하늘에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이다
팔을 뻗어 장사 해변의 밤하늘을 걷어 와
맑고, 어진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길은 안개에서 시작하였으므로
길의 끝까지 가 본 사람은 누구도 없다
문득,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분들께
붉게 익어 겨울 지난
망개 열매 하나씩을 드리고 싶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목 13
감자 14
벽두(劈頭) 16
봄비 17
나무의 입술 18
분꽃, 불탄다 20
낮달맞이꽃 21
곱다 22
봄에 불멸을 만나다 24
물을 열다 26
물 27
떠도는 것은 넘어지지 않는다 28
불빛의 뼈 30
눈밭의 망개 열매 31
손난로 32

제2부

장맛비 내리는 날에는 밀수제비를 뜬다 35
머리를 쓰다듬다 36
목어(目語) 1 38
솔기 1 40
솔기 2 41
배꼽언덕 42
버선꽃 44
물마디꽃 1 46
물마디꽃 2 47
담배나방 48
몸의 소리 50
구름 요리 52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54
구멍 난 겨울을 호다 56
말꽃 58

제3부

자라지 않는 햄스터 61
풀씨를 열다 62
봄볕을 쓰다듬다 64
갈피 65
속은 곱다 66
처음 가는 길 68
손을 내밀면 70
거울 72
그릴 수 없어 그리워한다 74
물거울이 걸리다 76
수세미를 읽다 78
간고등어 80
세상 누구도 영생할 수는 없어 82
뒷덜미를 긁적이다 84
망요(忘腰) 86

제4부

동그라미만 믿었다 89
자주달개비의 문 2 90
강아지와 골목이 있는 비대칭 풍경 92
드림열쇠집 94
물맛 96
어스름에 젖다 97
부젓가락 98
빈 페트병 99
도도(Dodo) 100
파꽃 2 102
싱크홀 104
들통이 났다 106
등골 108
반딧불이는 옷을 입지 않는다 110
너라는 정물 112

해설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겸허한 찬가 113
/진순애(문학평론가)

책 속으로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황홀한 밀밭의 한여름 질식을 기억하기 위하여
아래 위를 바꿀 수 있는
뜨거운 형식이 필요한 거예요
하얀 분말로 갇히면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바람으로 부푼 당신의 차가운 숙성이
몸을 비틀며 가장 뜨거운 시간여행을 시작하는
겨울날이었나요
팥소를 몸에 들인 당신은 낮달처럼 안색이 변하고
입천장이 벗겨진 나는
멀고 먼 하루를 얼버무리고 말았어요
무너져야 설 수 있다고 했나요
얼어붙은 유리창 같은 하늘을 유영하는
더운 몸의 당신이 있는 한
아무도 얼어 죽지 않고 겨울을 나겠지요
흐린 풍경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그리운 어머니를 이곳으로 모셔오기 위해
햇살 좋은 겨울날이면
나는 때때로 당신이 되고 싶어요
밀밭에서 떠나온 당신의 고향은 어쩜
그렇게 붕어빵이겠어요
빵빵한 붕어빵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어요   

출판사 서평

[책 소개]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겸허한 찬가

 1.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찬

아름다운 것에 대한 예찬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예의이며, 그것은 인간의 숭고한 정신이 표현되는 행위다. 현대는 아름다운 것이 소멸한 혹은 아름다운 것을 상실한 시대이므로, 아름다운 것을 찾아가는 시선이 값질 뿐만 아니라 숭고하기조차 하다. 김인숙의 이번 시집이 보다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겸허한 행보인 까닭에 더욱더 그러하다. 

 
인간의 숭고한 정신 혹은 숭배의식은 우주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외경에서 비롯된 원시인들의 금기문화에서 유래한다. 원시인들에게 우주자연은 신적인 것을 대변했듯 우주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낳은 원시인들의 금기문화에서 숭고미를 찾는 것은 인문학의 근원이 원시인들의 금기에 있음을 방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과학기술 시대의 우리는 원시인들의 금기문화를 미신이라고 치부할 것이나, 원시인들의 금기 그리고 원시인들의 숭배의식이 있어서 인간은 동물적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금기의 신화 혹은 금기 위반의 신화로 인해 인간은 문명의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찬가에 실린 숭배의식은 과학기술주의 시대에도 시가 현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방증하는 일이듯 현대에 이르러 숭배의식의 발현은 오직 시장르만의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경의 대상이었던 생명체의 근원세계가 그 뿌리마저 파헤쳐진 지 오래이므로, 이제 영원성의 상징계였던 근원세계는 더 이상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초월이 부재한 시대에 불멸성을 노래하는 시는 시의 초월적 본분을 굳건히 지키는 일로써 숭고성과 함께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시의 역할이야말로 이 시대 시의 현존성이므로, 여기에 불멸성에 대한 김인숙의 찬가가 그리고 찬가로서의 예의가 숭고미조차동반하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길을 떠나는 자에게 돌아올 곳이 있음을 각인시켜주는 것과 같은 시장르만의 특별한 위의를 김인숙의 시가 대변하고 있는 것과 같다.

2. 봄에 대한 찬가

꽃은 피어서 청청 푸른 산으로 간다
가서 누운 꽃은 돌아오지 않고
담장 이쪽의 집은 담장 너머의 집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유를 만나 자유를 넘거나
사랑을 놓치고 탕탕 총을 쏘듯
봄꽃을 피운다, 해마다
떨어진 꽃은 다시 피어서 돌아오고
이 세상, 저 세상, 구만 구천 세상을 합하여
세상 속의 것들은
다만 옮겨갈 뿐 소멸하지 않는다
오늘
집을 떠나 광장으로 가는 당신의 사랑은 영원하다
개울의 반짝임은 사라지지 않고 들판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봄에 만난 숲은 봄 속에 있고, 늙지 않으면서
봄철을 산다
사람들의 사랑은 날마다 살아 있고 오늘이 내일인
의자는 시간의 밥이란 걸 아시는지
따뜻한 통로를 지나는 무동력의
낙화는 불멸이며, 자유인 것을
꽃은 아시는지 피어서 하늘 끝 푸른 산으로 간다
불타는 불길이 청청 불길을 탄다
-「봄에 불멸을 만나다」 전문

‘봄에 불멸을 만난다’는 명제는 인류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비례하여 참신하지 않다. ‘참신하지 않다’기보다는 ‘참신할 수 없을지’라도 이와 같은 보편성의 명제는 우리에게 ‘근원에 대한 혹은 근원의 존재성에 대한 본질을 재고하라’는 강력한 힘과 같으므로 참신성을 초월한다. 그것은 불멸성에 대한 예찬을 방증하는 일인 까닭에 그러하며, 현대가 더 이상근원적인 본질에 대한 사유가 무의미한 시대로 전락한 까닭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비록 우리에게서 잊힌 사유의 세계일지라도 그 세계가 ‘아직은’ 소멸하지 않은 혹은 소멸할 수없는 궁극의 세계이므로, 혹은 김인숙의 지적처럼 ‘해마다 떨어진 꽃은 다시 피어서 봄에 돌아오므로’ 봄은 불멸의 계절이자 우리를 불멸의 근원으로 유인하는 숭고한 부활의 계절이다. 

 
해마다 부활하는 봄이 불멸의 계절이듯 ‘세상 속의 것들도 다만 옮겨갈 뿐 소멸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이에 더하여, 불멸의 봄으로 인해 ‘집을 떠나 광장으로 가는 당신의 사랑조차 영원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불멸의 봄에 대한 찬가 또한 소멸할 수 없다. 반복되는 찬가일지라도 그것은 반복의 찬가를 넘어서는 불멸의 탄생이요 부활이다. “개울의 반짝임은 사라지지 않고 들판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고 반복적으로 노래해야만 하며, “봄에 만난 숲은 봄 속에 있고, 늙지 않으면서/봄철을 산다”는 사실을 새삼 재고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함으로써만 ‘사람들의 사랑도 날마다 살아 있는 사랑’이 되는 까닭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낙화를 불멸로 소생시키는 봄’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예찬되어 마땅하다. 예찬의 노래 속에 불멸의 봄에 대한 김인숙의 숭고한 예의가 함께해서 ‘봄조차 숭고하다’는 아름다운 패러독스를 낳는다.

손등이 따뜻하다 살 위로 배추벌레가 기어가고 가물가물 소름으로 돋는 추위가 빠져 나가고 날아오르는 새의 깃털이 바람결에 날리고 봄볕 따슨 풀밭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호수 같은 무릎베개에는 만수의 잠이 차오르고 아지랑이와 새털구름과 물비늘을 버무린 열무김치 시원한 국물이 찰방거렸다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얼굴을 만지다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끌려 나는 자꾸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봄은 가파르게 무르익고 나는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들판의 일부가 되었다

새의 혀 같은 연록의 잎들이 몸을 흔들어 반짝이는 빛살을 쓰다듬고 가려움을 탄 빗살들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떨어지고 여린 바람 한 줄기 지나가고

곱고 부드러운 손들이 들판 가득 저보다 더 부드러운 봄볕을 자꾸 쓰다듬는 한낮 어머니의 딸이 어머니가 되어 만지고 쓸어내리고 쓰다듬는 배꽃 하얀 잎들이 꿈에 들어 꿈결 같은 봄볕이 되고 있다
-「봄볕을 쓰다듬다」 전문

불멸의 봄은 ‘살 위로 배추벌레가 기어가고 날아오르는 새의 깃털이 바람결에 날리며 따슨 어머니처럼 온다’고 김인숙은 예찬한다. ‘따슨 어머니처럼 오는 부활의 봄’에 ‘새의 혀 같은 연록의 잎들이 몸을 흔들어 반짝이는 빛살을 쓰다듬고 가려움을 탄 빗살들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떨어지고 여린 바람 한 줄기 지나가는 봄날에 배꽃 하얀 잎들이 꿈에 들어 꿈결 같은 봄볕’이 부활한다. 봄이 꿈결이고, 꿈이 봄볕이다. 봄이 가파르게 무르익은 날에 김인숙은 그리고 김인숙의 찬가로 인해 우리는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들판의 일부’가 되면서 숭고한 꿈결의 봄과 일체가 된다.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얼굴을 만지다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끌려 나는 자꾸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김인숙의 잠의 근원도 따뜻한 봄의 손길에 있다.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들판의 일부가 되어 잠들’수 있는 요인도 ‘가파르게 무르익어가는 꿈결의 봄날’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문명세계를 등지고 들판의 일부가 되어서 불멸의 봄날을 예찬하는 시심은 겸허하다. 그것은 겸허한 외경심이다. 겸허한 외경심 뒤에서 영원에 대한 김인숙의 숭배의식을 읽는 것 또한 찬란한 불멸의 봄날이 낳은 유인력이리라.

3. 어둠에 대한 찬가

황홀한 색깔 춤은 끝났다
새가 둥지에 든
나무마다 어둠을 풀어내고
어스름에 젖는 강이 어디론가 걸어 들어가고 있다
노크는 없었다
문이 닫히고 소리가 사라지면서
인도교 아래
혼곤한 평화가 이슬비처럼 흐르고
새벽을 예비하기 위하여 별 몇 개가 떴다
아찔한 대낮, 격정의 시간
아름다운 색깔들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모두 잠들어야 한다
잠든 채 역사를 건너기 위해
잠보다 깊은 망각에 들어야 한다
담장을 넘던 능소화도 어스름에 젖어
어둑어둑 증발하고 있다
-「어스름에 젖다」 전문

어둠은 모든 색깔을 그리고 형상을 잠들게 한다. 그러므로 “나무마다 어둠을 풀어내고/어스름에 젖는 강이 어디론가 걸어 들어가고”, 그리하여 ‘인도교 아래 혼곤한 평화가 이슬비처럼 흐르고 새벽을 예비하기 위하여 별 몇 개가 뜨는 밤’이 온다. ‘담장을 넘던 능소화도 어스름에 젖어 어둑어둑 증발하는 시간’, ‘이제 우리도 모두 어스름에 젖어서 잠들어야하는 시간’이다. 잠들어야 하는 시간 속으로 ‘아름다운 형상의 색깔들이 사라졌어도’ 그것은 만개를 위한 휴지일 뿐이다. 어둠의 휴지 속에서 코스모스를 위해서 카오스가, 카오스를 위해서 코스모스가 순환하는 우주의 원리를 확인한다.


만물이 잠들고 우리도 잠들어야 하는 시간은 어스름이 가져온 우주의 시간이므로, 잠은 우주이고 우리도 우주이다. 영원의 근원에 대한 김인숙의 찬가 뒤에서 우주자연의 일부임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성에 대한 환기와 함께 ‘새벽을 예비하기 위한 숭고한 별’조차 만난다. 새벽을 예비하고 아침을 예비하는 별이 빛나는 어둠에 대한 찬가는 겸허에서 비롯된 숭배의 통로이다. 외경의 자연 앞에서 겸허로써 빚은 인간의 혹은 김인숙의 숭배의식이 찬가로 울리며 숭고미로 고양된다.

물을 열고
보름달이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보름달은
얼굴이 훤하게 밝고
강물은 스르르 전신이 고요하다
물을 연다는 것은 고요를 여는 것이다
고요를 연다는 것은 고요 속에 빠지는 일,
물의 가장 낮은 아래에 좌정하는 일이다
열린 물도
들어가 앉은 보름달도
서로가 편안한 밤
수면에 쏟아진
달빛 가루만 별처럼 재잘거리는데
지고 온 무게를 벗은 보름달이 해탈이다
속이 거북하지 않은 강물이 적멸이다
-「물을 열다」 전문

“물을 열고/보름달이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는 카오스의 풍경도 어둠이 만든다. 보름달이 들어가도록 물을 여는 주체가 어둠인 까닭이다. 우리가 ‘태아처럼’ 둥근 자세로 봄 들판과 하나 되듯 보름달도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강물과 하나 된다. ‘강물은 스르르 전신이 고요하다’하듯 어둠은 강물조차 ‘고요 속에 빠지게 한다.’ 어둠이 고요고 고요가 어둠이며 어둠의 강물도 고요고 강물 속의 보름달도 고요다. 어둠의 고요가 있어서 빛의 소요가 소요롭다. 빛과 어둠, 고요와 소요가 우주의 한 쌍이듯 모두 어둠의 고요 속에서 아름다운 일체가 된다.


그러므로 “열린 물도/들어가 앉은 보름달도/서로가 편안한 밤”에 “수면에 쏟아진/달빛 가루만 별처럼 재잘거리는데” 이것이 ‘해탈’이라는 선언도 겸허하다. ‘지고 온 무게를 벗은 보름달이 해탈이고, 보름달을 품은 강물이 속이 거북하지 않은 적멸’이 해탈이다. ‘인간의 해탈은 보름달을 품은 강물 속에서 혹은 만물을 품은 어둠의 고요 속에서 빚어진다’는 메시지가 ‘해탈을 위하여 어둠 속에 잠기라’고 유인하는 어둠의 힘이다. 어둠이 유인하는 불멸의 메시지다.

4. 성찰적 찬가

들판 가운데 연못에 하늘이 들어와 있다
차르르 주름 잡히는 물무늬 아래 오리처럼 떠가는 구름들
침잠하는 부레에서 빠져나온 물방울 같은 말들이
바글바글 비누거품처럼 부풀고 있다
하늘빛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말의 내력을 들여다본다
가득차서 씹지도 뱉지도 못하는 입안에서
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 고백이 있었을 것이다
불두화처럼 피는 개구리 알집이 천의 눈동자가 되어 반짝여도
창과 창을 마주내지 않는 한 세상은 언제까지나 깜깜했을 것이다
패랭이꽃 같은 여자가 방파제 끝에서 흐느끼고 있다
흐린 날의 눈을 보는 눈 있는 사람들은
산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여 볼 것이다
보는 눈이 무서워 차마 날려 보내지 못하고
입안에 가둔 눈물의 등뼈를 은밀히 가늠할 것이다
말도 진실하면 젖어드는데
동굴에서 울려 나온 듯 광장 같은 눈으로 푸르게 응답하는
거기 물 아래, 하늘 아래
눈 속에 들어가 자리 잡은 당신과 나, 우리들 눈으로 오가는 말
부풀어 오른다고 해서 모두 꿈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의 말을 주고받으며 황토 들길을 가는 사람만이 사람인 것을 안다
앞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개구리의 눈알은 구슬처럼 굵고
말로써 생각을 모두 전할 수는 없는 일이라
들판 가운데 연못에 들어와 앉은 하늘의 옆구리를
오늘은 쿡쿡 찔러본다
-「목어(目語) 1」 전문

‘들판 가운데 연못에 하늘이 들어와 있고, 차르르 주름 잡히는 물무늬 아래 오리처럼 떠가는 구름들’ 그리고 ‘침잠하는 부레에서 빠져나온 물방울 같은 말들이 바글바글 비누거품처럼 부풀고 있는’ 연못 풍경이 ‘말의 내력’이라는 말에 대한 김인숙의 성찰을 읽는다. 그것은 근원이 낳은 인간으로서의 성찰이다. 그러므로 근원세계에서 비롯된 말의 내력일지라도, “말로써 생각을 모두 전할 수는 없는 일이라/들판 가운데 연못에 들어와 앉은 하늘의 옆구리를/오늘은 쿡쿡 찔러본다”는 전언에서 말로써 하고자 하는 말을‘모두 전할 수 없는’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성찰을 확인한다.


비록 “하늘빛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말의 내력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그 말을 “가득차서 씹지도 뱉지도 못하는 입안에서/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 고백”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인간다움이자 인간의 한계에 대한 확인이다. 그러면서도‘말도 진실하면 젖어듦’으로“사람의 말을 주고받으며 황토 들길을 가는 사람만이 사람인 것을 안다”는 명제 앞에서 ‘사람의 말’과 ‘사람의 말이 아닌 말’을 구별해야한다는 당위를 만난다. “흐린 날의 눈을 보는 눈 있는 사람들은/산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여 볼 것이다”에서도 ‘눈을 보는 눈 있는 사람들’과 ‘눈을 못 보는 눈 없는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는 당위를 확인한다. “말도 진실하면 젖어드는데/동굴에서 울려 나온 듯 광장 같은 눈으로 푸르게 응답하는/거기 물 아래, 하늘 아래/눈 속에 들어가 자리 잡은 당신과 나, 우리들 눈으로 오가는 말”처럼 ‘진실한 말’ 혹은 ‘진실한 사람의 말’이란 ‘말의 말’이 아니라 ‘눈으로 오가는 말’에 있다는 김인숙의 은밀한 밀어가 말의 내력에 대한 혹은 말 없음의 말에 대한 예찬을 겸허히 내재하고 있다. 거기에는 숭배의식이 잠입해 있는 까닭에 겸허하다.


“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자유의 뼈를 만질 것이라/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안으로 걸린 빗장을 열지 못하는 것은/잉크 색의 푸른 피가 아직 흐르고 있어서이다/…(중략)…/얇은 창유리 오종종하게 내어/뒤늦은 말문 열어놓고 말없이 바라보는 그녀/곤한 얼굴에 내려앉은 별빛이 천연 염색되는 저녁/긴 낮을 지나와 시든 손바닥으로/지상의 그녀가 천상의 푸른 별을 곱다고 쓰다듬는다”(「자주달개비의 문2」부분)는 자주달개비의 푸른 이미지도 ‘말의 말’이 아니라 ‘말문 열어놓고 말없이 바라보는’ 침묵의 내력을 예찬하는 메시지를 함유한다. 그것은 ‘말의 말’을 초월하는 목어(目語)와 같은 침묵의 말로써 우리를 성찰에 이르게 하는 그리고 예찬되어 마땅한 아름다운 불멸의 세계라는 김인숙의 찬가이다. 그것은 겸허를 낳는, 김인숙의 예찬 속에 내재된 숭배의식의 본원이자 존재의 본원이므로, 되풀이하여 성찰적으로 예찬되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