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자유주의/아나키스트 자유주의

한국아나키즘학회 2015 정기학술대회[2015.02.14./경북대 사회과학대 교수회의실]

김주완 2015. 2. 14. 21:00

 

 

 

 

 

 

 

 

 

 

인간 하기락과 자유*

 

김 주 완(전 대구한의대 교수/경북문인협회 회장)

 

1.

 

자연 상태에서 기억의 유효기간은 일주일이라고 한다. 감정의 유효기간은 조금 더 길어서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라는 보고도 있다. 기억은 오래 가지 않고 망각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다. 아나키스트 철학자, 거장 하기락이 타계한 지 18년이 지났다. 잊혀도 한참은 잊혔을 기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하기락을 호명하고 이 자리에서 그의 삶과 정신을 조명하고자 한다. 하기락을 말하는 것은 하기락을 불러 생생하게 만나는 일이다. 이것은 그는 갔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반증의 자리를 마련해 준 한국아나키즘학회 강동권 회장님과 하기락을 계승하는 직계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발표자는 1982년부터 하기락이 타계한 1997년까지의 15년 동안 하기락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공부한 사람이다. 하기락이 서거하였을 때는 총괄 간사를 맡아 하기락이 창립한 대한철학회장(大韓哲學會葬)으로 사일장을 치렀으며 일주기에는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던 대한철학회지 철학연구64(19982월 발간)을 추모 특집으로 꾸몄다. 여기에는 김성국 교수의 논문 허유 하기락의 아나키즘 소고와 발표자의 졸고 하기락과 자유가 실렸다. 서거 5개월 후에 결성된 <철학자 허유 하기락 선생 학덕비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발표자는 간사장을 맡아 전국의 철학자와 문인 등 128명으로부터 14,440,000을 모금하여 5년만인 200268일에 하기락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 학덕비를 세웠다. 학덕비 제막 당시 발표자는 재직 대학인 대구한의대에서는 대학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또한 학계에서는 대한철학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시기였다. 이로부터 4년 후인 2006년에 대한철학회지 철학연구100(200611월 발간) 기념 별책 부록 흔적(신국판 508) 6부 주요기록에 학회장 거행 내역과 학덕비 건립 내역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인간 하기락과 자유라는 제하의 이 발표문은 따라서 1998년에 쓴 발표자의 졸고 하기락과 자유 중에서 하기락의 인간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을 가져오고 학회장 및 학덕비 건립 등의 과정 일부를 추가하여 구성함으로써 하기락이 일생에 걸쳐서 추구하였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궤적을 드러내고자 한다.

 

2.

 

199723일 점심 식사 직후 발표자는 하기락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대한철학회 실무를 맡고 있는 이남원, 문성학, 이윤복, 유철 교수와 함께 경북대학교병원 영안실로 가서 유족 대표 하영석 교수(고인의 장남)를 만났다. 장례를 대한철학회장으로 치르는 문제에 대하여 유족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후 유선 전화를 이용하여 전국에 있는 상임운영위원들과 의견을 나누었으며 회장인 부산대 김위성 교수와 직전회장인 경북대 이강조 교수의 최종 결단으로 대한철학회장 거행이 결정되었다. 준비 관계로 사일장을 치르기로 했다. 장윤수 교수와 허재훈 박사가 참여하여 밤늦게 부고 문안이 작성되었으며 장례위원회가 구성되고 세부적인 업무분장이 마무리 되었다. 다음날부터는 뉴영남호텔 객실을 얻고 PC와 프린트기를 옮겨와서 영결식 준비와 보도자료, 연보, 조사 원고 등을 작성하였다. 길병휘, 김윤동, 이우백, 김용섭, 정낙림 교수가 추가로 투입되어 작업을 했다. 25일 석간부터 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일보 지면에 특집이 보도되기 시작하여 장례가 끝난 뒤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기사가 시리즈로 나갔다. KBS TV 대구방송에서는 특별편성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전국의 철학자들이 모여서 경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26일 오전 8시부터 거행한 영결식은 김도종 교수(현 원광대 총장)가 사회를 맡았고 장례위원장인 부산대 김위성 교수가 영결사를 하였으며 발표자는 전날 작시한 다음과 같은 조시를 읽었다.

 

[조시]

가셔도 가시지 않았으니

허유 하기락 선생님 영전에

 

.

 

선생님!

허유 선생님!

때 아닌 계절, 음력 섣달그믐에

저리도 자욱한 국화 숲에 누워서

가시나이까,

정녕 가시나이까.

 

지리산 백무동 골짜기를 밟아 올라

저물녘에 벽소령을 옆으로 끼고

표표한 발걸음으로 홀로 이르시던

세석평전을 거기 그대로 두고

저만큼 천왕봉을 거기 그대로 두고

 

노동자 농민이 자주인 되는 날이

아직도 아득히 멀기만 한데

힘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는

저 가련한 산업민주화는 어찌하라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사회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

서로 조화하여 21세기로 향하는

인류전체의 연대와 화평의 지침은 어찌하시고

 

가시나이까

선생님,

그리도 성큼성큼

정녕 가시나이까

허유 선생님!

 

 

.

 

선생님은 가셔도

그러나 가시지 않았으니,

대학의 도서관마다, 거리의 서점마다

연구실의 서가마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지주로 남으시고

후학들의 가슴에 심어진 말씀으로 있으시니

돌아보면 사방에 선생님이 계십니다.

 

세우신 학문과 닦으신 실천이

높고 맑아 고결하셨으며

고결하였으므로 타협을 싫어하신 성품은

때로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고

더러는 주변에 담을 쌓기도 하였지만

 

눈앞의 것보다 훨씬 먼 데까지 내다보는

지혜자의 순수한 모습은

마침내 대중을 끌어당겨

사상과 존재가 일치하는 진리보다

말과 사상이 일치하는 진실이

그보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성실이

진정한 도덕적 가치임을 깨치게 하여

제각기 최선의 자기를 건설케 하였습니다.

 

없음으로서의 있음,

항시 비워둠으로서 가득함,

()의 현실 저편에 빛나는 유()의 이상을

바라보며 노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천분임을

두 자 아호 허유(虛有)로 쓰시면서 가르치신

둔각을 깨뜨려 감싸 안는 예각적인 교훈이

저희에게 대하여 있는 한

선생님은 가셔도

영원히 가시지 않았나이다.

 

 

.

 

이제 선생님 가시는 곳

경남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늘밭,

거기는

당신의 눈 속에 흐리고 흐리던

역사가 빨아낸 자유의 빛깔도 돌아오고

앓는 공화국의 우울한 침묵도 걷혀지며

생전에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시던

지리산 힘찬 준령

형제봉, 칠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을

아침저녁으로 마주하여 대하시고

먼저 떠난 문인, 철학자 그리고 아나키스트

맑고 맑은 지인들과 만나시어

시원하게 넘쳐나는 담소를 종일토록 나누실 곳이오니

 

허유 선생님!

여든 여섯 해의 풍상과

칡넝쿨처럼 질긴 이 땅의 속박은 벗으시고

늘밭에서 고이 영면하소서.

맑은 새벽하늘

겨레와 철학과 자유를 지키는 별로 뜨셔서

남은 저희 오래 끌어 주소서.

 

3.

 

하기락은 산을 좋아했다. 전문적인 산악인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등산지식과 경험 그리고 지구력을 갖춘 하기락의 산에 대한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이러한 산에 대한 맹목적 사랑은 그의 순수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사랑은 맹목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하기락을 이야기하면서 산을 빼 놓는다면 이미 그 이야기는 하기락으로부터 많이 멀어져 버린 것일 수밖에 없다. 하기락은 왜 그처럼 산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는가? 산은 그 자체 시원의 침묵으로서 거기 있음으로써 도시와 세속으로부터 탈출한 인간에게 마음껏 해방공간을 제공하고 천부의 자유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도상에서의 사색과 가장 높은 곳에서의 개관을 허용한다. 힘들여 올라야 한다는 노고를 요구하지만 건강이라는 선물로 그것을 되돌려 준다. 하기락이 산을 좋아한 이유는 해방과 자유 그리고 사색과 개관이라는 산이 주는 선물에서 연유했던 것 같다. 건강은 보너스로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구 인근의 산행을 당일 코스로 나서기를 규칙적으로 하였고, 한 달에 한 두 차례씩은 고향인 안의의 용추계곡과 기백산을 찾거나, 지금 그의 묘소가 있는 거창군 마리면 늘밭을 찾았다. 그리고 일 년에 몇 차례씩은 몇 사람이 어울려 며칠씩이나 소요되는 큰 산행을 하였다. 그 어느 산행에서나 하기락은 젊은 사람들이 따라 내지 못할 만큼의 속도로 앞서서 산을 올랐고, 동행한 젊은 후학들은 언제나 기가 죽었다.

 

필자의 기억에 남는 산행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마등령 등정이다. 1987725일 하기락, 원로시인 석우 이윤수(石牛 李閏守; 1914~1997), 임종찬(영송여고), 발표자 등 네 사람은 대구 동부정류장에서 속초행 첫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속초 영랑정에서 열린 한국자유시인협회의 문학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원로 시인 구상(1919~2004) 이 주제 발표를 했고 그날 밤 우리는 영광호반에 있는 콘도에서 잠을 잤다. 밤에, 멋쟁이 원로시인 이윤수는 중년의 여류 시인들과 어울려 밤을 새웠고 하기락은 T.V를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며 임종찬과 필자는 장기를 두어 번 둔 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인 726일 아침, 자유시인협회 회원들과 작별한 후 우리는 곧장 마등령 등정에 나섰다. 설악산 입구에서 체력이 부실했던 임종찬은 망설이다가 결국 산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하기락과 이윤수와 발표자 세 사람은 금강굴을 옆으로 하며 본격적인 등산로에 들어섰다. 하기락과 이윤수는 얼마나 빨리 오르는지 그들보다 삼십 수년 수하인 발표자는 부끄럽게도 허겁지겁 뒤따르느라 혼이 났다. 하기락은 본래 산을 잘 타기로 소문이 나있었던 터이지만 이윤수도 하기락에 못지 않았다. 사실 이윤수는 합기도 공인 사단의 실력에 매일 아침 대구의 앞산 순환도로 조깅으로 단련된 몸이라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산을 오르는 두 노인의 기력은 나르는 호랑이를 연상하게 하였다. 아예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간 임종찬의 현명함이 부러우면서도 얄미웠다. 얼마 뒤 한숨 쉬어 가는 자리에서 우리는 우연히 서울에서 온 아가씨 두 명과 만나게 되었다. 노학자와 노시인의 멋진 베레모와 은은한 은발머리, 특히 귀밑까지 내려오는 이윤수의 은발의 장발에 아가씨들은 현혹된 것 같았다. 두 아가씨는 학교 동창으로서 대학 졸업 후 한 사람은 외국인 회사에 나머지 한 사람은 모 대사관에 근무하는데 휴가기간을 서로 맞추어 설악산엘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금강굴만 구경하려고 했다는데 믿음직한 할아버지인 이윤수의 권유에 따라 우리와 같이 마등령을 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녀들은 서울여성 특유의 명랑함과 애교스러움 그리고 20대 중반의 발랄함으로 곧 하기락과 이윤수와 가까워졌다. 어울려 산을 오르는 가운데 두 아가씨와 두 노인은 어느새 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몸집이 약간 있는 아가씨는 하기락의 파트너로, 날씬했지만 키가 좀 작은아가씨는 이윤수의 파트너로 자연스럽게 굳어지면서 가파른 능선을 오를 때나 작은 바위틈을 건널 뛸 때 두 노인네는 각각의 파트너를 도와주며 챙겼다. 이때부터 발표자는 느긋하게 뒤따를 수 있었다. 여성과 보조를 맞추느라 하기락과 이윤수가 이전처럼 빨리 오를 수가 없었고, 또한 필자가 옆에 달라붙어 두 노인의 말벗이 되어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발표자는 멀찌감치 뒤따라 오르면서 사이사이에 담배도 피워 가면서 여유를 즐겼다. 가파른 고갯마루를 올라 미끈하게 벋은 마등령 능선을 밟아 나갈 때 우리는 모두 절경에 매료되고 있었다. 산 아래 우뚝 우뚝 솟은 명산의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며 걷는 평평한 마등령 능선엔 가녀린 꽃대 끝에서 애잔하게 핀 산나리 꽃이 자욱했고 꽃잎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검정 반점이 눈물겨웠다. 그 사이로 노철학자와 노시인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여성 두 명이 그들 옆에 짝짝이 붙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은 그대로 선경이었다. 노소동행의 살아있는 한 폭 그림이었다.

 

우리는 백담사 쪽으로 하산했다.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인지라 내려오는 길은 군데군데 사태가 나서 험악했고 계곡의 다리가 끊어진 곳도 있었다. 저물기 전에 산 아래에 닿기 위하여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지만 중간에 비를 만났고 변변치 못한 우의를 뒤집어 쓴 채 더욱 서둘렀다. 배낭이 무거웠던 필자를 안쓰럽게 본 이윤수가 몇 번씩이나 뒤쳐진 필자를 기다려 주었고 끊어진 다리를 건널 땐 도움을 주었다. 어두워진 후에 우리는 백담사에 도착했고, 대충 저녁을 때운 후 젊은 그녀들은 요사채에서 하기락과 이윤수와 필자는 선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굵고 세찬 빗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잠이 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잤다.

다음 날인 728일 아침, 우리는 부슬비를 맞으며 용대리로 하산했고 인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으며 서울역에서 밤 1030분에 출발하는 통일호 열차를 타고 대구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날 새벽 4시였다. 그 후 그녀들과의 연락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필자는 지금까지도 그녀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후에도 하기락과 이윤수를 중심으로 한 산행은 지리산과 가야산, 기백산과 팔공산 등에서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때마다 잊지 못할 기억들이 만들어지고는 하였다.

 

4.

 

산을 좋아했던 하기락의 등산용 침낭은 각별하게 발표자의 기억에 남아 있다. 침낭 하면 곧바로 하기락의 서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기락의 서재는 세 평 남짓하였으며 사방의 벽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남은 공간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정도였다. 몇몇이 어울려 신년인사라도 갈라치면 으레 몇 사람은 방밖의 마루에 앉아야만 했다. 하기락은 거기서 연구하고 집필하며 기거하였다. 그 좁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반듯하게 개어서 펴놓은 침낭이 있었다. 군용으로 나온 카키색의 등산용 침낭이 하기락의 방석이자 침구로 쓰이는 것이다. 먼 산행을 할 때면 하기락은 이 침낭을 둘둘 말아 배낭에 넣고 나서곤 하였다. 워낙 협소한 공간이라 책상을 놓을 자리가 없었고, 머리맡에 작은 밥상을 놓고 책상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재떨이와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가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 커피포트와 인스턴트 커피병, 인삼차와 녹차 봉지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으로서의 작은 밥상 위에는 언제나 책이 펼쳐져 있었고 집필중의 원고지가 놓여 있었다. 이 밥상이 바로 하기락 만년의 역저들 특히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조선철학사의 방대한 원고를 써 낸 책상이다. 집필에 있어서 하기락은 주로 400자 원고지를 사용하였으며 필기구로는 튜브가 녹아 없어진 오래된 파카 만년필에 잉크를 찍어서 썼다. 여름철이 되면 하기락의 이 서재는 한증막이 되었다. 하기락은 더위를 피해 책상인 밥상을 들고 한 뼘 남짓한 마당의 철대문 옆의 그늘이나 브록크 담벼락 옆에 붙어 서있는 감나무 그늘로 옮겨가 짧은 파자마 차림으로 집필에 몰두하곤 하였다. 이러한 하기락의 형편과 모습은 꾀죄죄하거나 초라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꾀죄죄함이나 초라함이란 무엇인가? 부유함과 풍족함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에서 바라본 부족함이나 보잘 것 없음이 꾀죄죄함이나 초라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순수이다. 가진 것이 없이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그러한 삶이 곧 순수하면서도 고결한 삶이다. 발표자도 처음 하기락의 서재를 방문하였을 때는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큰 학자의 서재가 이럴 수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에 물든 눈으로 보았을 때의 평가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서재와 거기서 잡념 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하기락의 학자적 모습에 경건한 마음으로 발표자는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화려함의 추구는 허장성세로 흐르기 쉽고, 초라함의 추구는 자칫 위선에서 연유하기가 쉽다. 그러나 초라함을 의식하지 않는 초라함은 곧 순수로 이어지며 그것은 위대하고 감격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함 속에 젖어들게 한다.

 

5.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듣는 데서만 인간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제이다. 하기락을 일깨운 존재의 부름이란 무엇이었을까? 하기락은 존재의 어떤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격동하는 한국의 20세기를 그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살다 간 최고의 지성이 들은 존재가 부르는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최고의 지성이 듣는 소리라고 해서 일반인이 듣는 소리와 다를 수는 없다. 최고의 지성이 최고의 청력 소유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사람이 듣는 동일한 소리를 듣더라도 그 의미 이해와 본질 파악이 평범한 대중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가 부르는 소리에 대한 가청 범위가 다르다는 것은 이해 가능한 범위와 방향이 다르며 그것을 계기로 하여 어떤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기락이 존재의 부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그의 나이 여덟 살 때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덟 살 때 봄이었다. 장터에서 때 아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달려가 봤다. 헌병과 보조군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짓밟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 함성이 나면 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이쪽에서 또 함성을 올렸다.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지만, 나도 가슴을 조이며 덩달아 <만세>를 불렀다. 나라 잃은 백성의 아들로 태어난 나의 유년기는 이렇게 지나갔다.

 

하기락의 이 언급은 191931일에 있었던 기미독립운동(삼일운동)에 대한 증언이다. 모르긴 해도 독립만세운동이 안의마을까지 퍼져간 것은 그러니까 그해 3월말이나 4월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기락은 때를 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나이로 여덟 살이지만 만으로는 일곱 살인 어린 소년이 무슨 사상이나 주의를 가졌을 리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하기락 자신도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문도 모른 채 가슴을 조이며 덩달아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 때 이미 어린 하기락의 눈에는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 군대의 총칼 앞에서 맨몸으로 부딪쳐 자주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민중의 함성 소리가 깊이깊이 인각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계기가 뒷날 하기락으로 하여금 인간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삼고 이를 억압하는 정부 등의 권력조직과 군사조직, 그 밖의 종교적 사회적 구속을 부정하는 사상인 아나키즘으로 빠져들게 한 것으로 보인다.

 

격동하는 역사의 구비마다 되풀이하여 들려오는 존재의 부름을 하기락은 계속하여 들었을 것이다. 노도와 같은 4. 19의 젊은 함성, 지축을 울리던 5. 16의 탱크소리, 10. 26 심야의 권총소리, 12. 12의 군화소리, 창공을 치솟던 5. 18 광주의 한 맺힌 절규, 존재의 소리는 처절하였거나 또는 무자비하였고, 그 때마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더욱 강화되어 갔을 것이다.

 

1987626일 화요일 오후, 하기락은 금호커피숍에서 재야인사 몇 사람과의 면담을 끝낸 뒤 반월당 네거리에 있는 덕산빌딩 2층의 덕산커피숍으로 옮겨앉았다. 훗날 6월 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민중시위가 이즈음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당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고문으로 있었던 하기락은 때때로 불려나가 대중연설을 하였다. 이 날은 연설이 없었던 것 같았다. 덕산커피숍의 남쪽 통유리 창 옆에 자리 잡은 하기락은 커피가 식어 가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앞산 그리메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반월당 네거리 동서남북 각 방향에서 차도를 가득 메운 시위 군중이 교차로를 향해 노도처럼 몰려들었다. 전투경찰이 쏘는 최루탄과 시위군중이 앞세운 대형 깃발이 밀고 밀리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 자유와 민주를 되찾기 위한 민중의 함성을 하기락은 가슴으로 듣고 있었다. 이때 하기락과 같이 자리하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인 발표자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 공방전이 계속되는 반월당 네거리를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밀폐된 통유리 창이었지만 어디로 새어들어 오는지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어느새 커피숍 안을 채웠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지만 하기락은 간혹 눈물을 닦아내며 앉아 있었고 발표자 또한 그렇게 끝까지 앉아서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듣는 하기락의 모습을 목도하였다.

 

여덟 살 소년에서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존재의 부름을 듣고 얻은 하기락의 자유는 무엇인가? ()과 반()이 대립·갈등하여 지양될 때 어느 요소가 종합 속에 더 많이 남는가 하는 것은 결국 힘의 원리에 의거하는 것이며 대개의 경우 사회적 주목은 보다 강한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어서 강한 자는 늘 승리자가 된다. “사람의 수는 단결에 의하여 통일되고 지식에 의하여 인도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설파함으로써 일찍이 대중이 갖추어야 할 힘의 원리를 강조한 칼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며 여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가열되던 민중의 힘이 번번이 와해되고 단절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힘은 역사의 구비마다 결집되었지만 지식에 의하여 인도되지 못함으로서 결집된 힘의 의미는 의미 없음 또는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의미로 축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기락의 과제가 설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식에 의하여(노동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각성시키고; 필자주) 인도하는 일그것이 하기락 필생의 과업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기락이 들은 존재의 부름은 곧 지식에 의하여 인도하는 일그것이라고 보았을 때, 하기락과 하르트만 그리고 하이데거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기락은 하이데거의 명제와 같이 존재의 부름을 들었지만, 거기서 바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고 존재 그 자체의 해명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길을 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하기락의 연구 분야가 하이데거에서 하르트만으로 바뀌어진 배경이 설명된다. 자유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향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르트만이라는 토대 위에서 자유는 증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챙겨서 가지는 것이며, 시혜 받는 것이 아니라 각성의 결과물로서 되찾는 것이 된다.

 

해방과 자유의 실현이라는 존재의 부름을 계속하여 들으면서 하기락은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아나키스트로서의 그가 해야 할 일, 지식에 의하여 민중을 각성시키고 인도하는 일을 위하여 그는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지식에 의하여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를 얻었기에 그는 투쟁의 전면에 서는 운동가가 아니라 원리와 이념을 캐내고 해명하는 사상가의 입장에 섰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는 철학이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6.

 

대구권의 N. 하르트만 학도들은 외적 강제에 의해서가 내적 자기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모여 자유로이 독회를 시작했다. 1988년에서 1992년에 이르기까지 5년여 동안 하기락을 스승으로 모시고 조욱연(효가대), 김태양(김산전문대), 성홍기(계명대), 발표자 등이 일주일에 세 차례 (방학중에는 주 6) 모여 N. 하르트만의 저서와 관련 논문들을 읽었다. 우리는 모두 늦깎이 내제자(內弟子)였고 생활에 쫓겨 할당된 분량의 번역을 해오지 못하는 때가 자주 있었지만 그럴 때는 으레 하기락이 읽어 나갔고 우리는 따라 갔다. 하기락이 언짢아한 기억은 없지만 호된 꾸중은 자주 들었다. 잘못된 번역을 했을 때의 나무람은 단호했고 그 질책은 주변 분위기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태만에 대한 꾸중이었지 무능에 대한 책망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 꾸중을 달게 받았고 아무도 감정의 상처는 입지 않았다. 나중에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대우학술재단의 지원금을 받으면서 독회는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장소는 대구시 봉산동 소재 형설출판사 2층 응접실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뒤늦게는 종교문제연구소(동대구역 부근)와 한국의원(대구시 덕산동 소재) 2층의 사용하지 않는 물리치료실도 간혹 이용하였고 조욱연의 연구실도 몇 번 사용하였다.

 

정확한 번역과 명료한 서술은 하기락의 정확성과 엄밀성의 표징으로서 독일어와 우리말의 경계를 깡그리 지워버리는 것이었고, 곧장 그것은 삶의 성실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배우는 입장의 우리들 중 거의 모두가 독회 시작 시간을 넘기고 늦게 참석하는 경우가 번갈아 가며 더러 있었지만, 하기락은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고 언제나 10~20분전에 먼저 도착하여 우리들이 모일 때까지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독회에서 뿐만이 아니고 다른 일로 만날 때에 있어서도 하기락이 약속시간에 늦는 경우를 필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기락의 자유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약속을 꼭 지키는 자유였으며, 그것도 시간에 겨우 맞추거나 늦는 자유가 아니라 앞당겨 당도하여 기다리는 자유였다.

 

독회가 끝나면 거의 언제나 우리는 인근에 있는 염매시장 죽집이나 덕산빌딩 맞은편 골목 칼국수집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하거나 뉴욕 피자호프에 앉아 차를 마시며 독회에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주제로 담론을 나누었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염소탕집이나 보신탕집 혹은 곰탕집으로 몰려가 영양을 보충하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서는 대개 일이 많은 조욱연이 먼저 나갔고 다음으로 김태양이나 성홍기가 나갔으며 발표자는 끝까지 남아 있다가 하기락을 댁까지 모셨다. 1991년 이후에는 필자도 어줍잖은 본부보직을 한답시고 그러한 소임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가 독회를 시작한 것이 1988111일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꼭 그 시기에 시작했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보면 사회·정치적 혼란기였던 1987년이 지나가고 그나마 표면적으로는 안정을 찾아갔던 때가 그 때 쯤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987년은 6월 민주항쟁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해 이었으며 동년 926일 국민운동 본부가 주최한 집회에서 연설을 하던 하기락이 쓰러져 협심증으로 병원치료를 받았던 해이다. 하기락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일주일 만에 병석에서 일어나 하기락 논문집 제 4의 교정과 한국자주인연맹의 기관지 자유연합의 편집 그리고 다음해 10월로 예정된 세계아나키스트 대회 서울 유치를 위한 준비에 진력하였다. 뒤이어 19871027일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9차 개헌에 대한 국민 투표가 있었고, 개정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같은 해 1217일 실시되었다. 비록 각색된 허상이기는 하였지만 국민대중은 무지갯빛 민주화의 꿈에 부풀어 있었고 사회·정치적 이슈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올림픽 서울유치의 해인 1988년은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기락의 눈에는 그러한 사회·정치적 변화가 그리 만족스럽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참된 자유를 바라보고 추구하는 노철학자의 눈에 얄팍한 술수로 분장한 현실정치의 실체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욕피자호프에서 피자로 식사를 때우는 날은 으레 한나절 이상의 시간을 우리는 각종 사회현실과 국가의 실체, 자유의 본질 등에 대하여 열변을 뿜어내는 하기락의 살아있는 강의를 들어야 했다. 더러 원로시인 석우 이윤수가 우연히 합석하여 40년 지기의 우정과 정심(正心)으로 동조하며 분위기를 가열시키기도 했고 그럴 때의 하기락과 이윤수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날의 그들로 돌아가 자못 가열찬 주장과 현실 비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다. 두 분 모두 순정이 강했던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기락은 자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하였다. 속눈썹이 수정체를 향해 솟아나는 현상 때문에 그렇기도 했겠지만 노안으로 몇 시간씩 독회를 하느라 작은 활자의 원서를 들여다본 직후에 담배연기가 자욱한 호프집에 앉아 다시 몇 시간을 보내느라 더욱 그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래 앉아 있기가 민망하여 필자는 몇 번씩 커피를 다시 시켜 마신 기억도 있다. 그럴 때 하기락과 이윤수는 커피대신에 생맥주를 시켰다. 술자리에선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술을 마시는 주류파로서 김태양이 원로 철학자와 원로 시인의 술시중을 들며 대작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김태양은 특유의 호인 웃음을 자주 웃으며 하기락과 이윤수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차분히 무르익는 술자리에서 하기락의 눈가로 자주 스쳐 지나가는 우수의 그림자를 발표자는 읽곤 하였다. 하기락의 우울과 눈물은 어쩌면 시대와 역사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발표자는 문득문득 하곤 하였다. 이때의 정경을 그린 발표자의 다음과 같은 졸시가 있다.

 

겨울 장마

-老哲學者 虛有 河岐洛 先生

 

겨울 저녁비 내리고

젖은 도시의

거리는 추상의 옷을 입는다.

변형의 계절에 앉아

뼈 추리는 작업 깊은

노안의 철학자는 힘이 들까,

더러 눈물 나고

눈꺼풀 찌르는 속눈썹 아픈

가슴의 빗소리

잠시 머물다 지나간 사람들의

부서진 숨결들이 되살아나는

토요일 오후 네 시,

봉산동 지선도로변 뉴욕 피자호프의

구석자리 이방에서 일던 안개숲 속

앓는 공화국의 우울한 침묵이

비에 젖는다, 아득히

먼저 떠난 아나키스트

맑고 맑은 이국의 동지들과 마주앉아

커피 값으로 마시는 생맥주잔 너머

역사가 빨아낸 자유의 빛깔은

당신의 눈 속에 흐리고 흐리다,

외계의 장맛비 칼질하는 저녁 때.

 

7.

 

인간의 해방또는 실존의 자유, 이것이 나의 철학적 테마요, 또 목표였다.”는 하기락의 언명은 철학자로서 아나키스트였던 그의 입장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철학과 아나키즘을 따로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구현되는 아나키 사회의 실현이 그의 삶의 목표였다면, 그러한 목표달성을 위하여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이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락의 자기과업으로서의 철학적 업적은 방대한 분량과 넓고 깊은 내용의 연구 실적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삶의 목표로서의 아나키 사회 건설을 위한 그의 헌신은 민중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계몽의 노력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기락이 실천적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 가담에서 시작하여, 193912월 와세다 대학 오오구마회관에서 식민지정책 비판과 일경검속 및 옥고, 뒤이어 와세다대학과 동경대학에서 벌인 아나키즘 선전활동, 1945. 9. 29. <자유사회건설자연맹(약칭 自聯, F.S.B.F.) 결성대회(서울 종로)> 참여, 1946. 2. 21 ~ 2. 22 <경남북 아나키스트대회>개최(부산 금강사), 1946. 4. 20 ~ 4. 23 <전국 아나키스트대회>개최 (경남 안의 용추사), 1952. 10. 3 <독립노농당 경북특위 위원장>취임, 1972. 2 <민주통일당>결성 및 정책위 의장 피선, 1987.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고문 역임 1987. 8. 21 ~ 8. 22 <한국자주인연맹 제 4차 대표자회의> 개최(대구 계명대 강당), 1988. 10. 28 ~ 10. 31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회의> 개최(서울 세종회관 강당>, 동년 10. 31 <국제평화협회> 발기, 1990. 4. 6. <사회주의정당>창당 준비위원장 역임 (서울 YWCA 강당에서 발기인 대회 거행), 1993. 4. 17 <대구 아나키즘 연구회>출범 등 사이사이 공백은 있었지만 일생에 걸쳐 실천적 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로서 얻은 하기락의 국제적 명성과 각종 국제대회 참석과 연설 또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1984. 9. 24 - 9. 29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세계아나키스트대회 참석과 영문판 한국 아나키스트운동 약사배부, 1989. 6. 22 샌프란시스코 아나키스트대회 참석과 연설(주제: 국가의 실체와 군사력의 해소), 1990. 1. 22 ~ 1. 28 소비에트 사이언스 아카데미 초청 방소 강연(주제: 한소관계의 과거와 현재), 1990. 11. 1 ~ 11. 14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웨덴 신디칼리스트(노동조합운동) 회의 참석과 발표(주제: 정경유착의 실례와 그 구조적 개혁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기락의 실천적 삶에 있어서 중점은 역시 계몽에 주어져야 한다고 발표자는 생각한다. 하기락은 한국자주인연맹 기관지인 자유연합(FAK BULLETIN) 편집자로서 1946. 4. 1자 제1호를 필두로 하여 1989. 5. 1자 제6호까지 제작·배포하였으며, 국제평화협회(INTERNATIONAL PEACE ASSOCIATION) 기관지 平協의 편집인으로서 1990. 3. 1자 제1호를 시작으로 하여 운명할 때까지 제작·배포하였다. 1987년에서 1990년에 이르는 사이에 발행한 신문의 제작 과정은 필자가 가까이에서 목격하였다. 하기락은 손수 원고를 작성하고 편집하였으며 자비로 출판하여 직접 배포하였다. 제자들이나 수하들이 넣어드리는 용돈은 전액이 신문출판비로 충당되었으며, 노안의 치료를 받아가며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쓰고 간이출판사 썰렁한 사무실에서 한 자 한 자 교정을 하였다. 인쇄가 끝나고 제본이 되어 나오는 신문을 애지중지 작은 묶음으로 나누어 경로우대증으로 타는 시내버스에 싣고 대구 남구의 남산동에서 수성구의 만촌동 자택까지 운반하였다. 노인의 쇠진한 기력으로 버스정류장에서 집에까지 신문을 옮기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기락은 집에 카트(cart)를 준비해 두고 그것으로 정류장에서 집까지 신문을 날랐다. 몇 번은 발표자의 승용차로 운반한 적도 있다. 그럴 때도 소방도로에서 짐을 내려 집까지 옮기는 일이 힘이 들어 카트를 이용해야만 했다. 배포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등산용 배낭에 신문 20~30부를 넣어 짊어지고는 울산공단, 창원공단, 구로공단, 구미공단 등으로 직접 나가 배포하였으며, 신문이 한 호 나오면 이와 같은 배포에 한 두 달 이상이 소요되었다. 간혹 외국 아나키스트 동지나, 사회운동가, 젊은 학자들의 원고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8.

 

영원한 자유인 하기락은 가고 하기락이 그처럼 간구(干求)했던 인간의 해방실존의 자유는 이제 후세대의 과제로 남겨졌다.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의 일생 86년은 발표자가 지은 비문, 1,309자의 글자로 요약되어 남았다. 비문을 옮기면서 이 발표문을 맺는다.

 

선생은 경술국치 2년 후인 1912126일 경상남도의 고읍古邑 이 곳 안의에서 나라 잃은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소싯적부터 명민하고 기개가 장한 선생은 1929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반에서 퇴학당한 후 경성중앙고보에 편입학하여 1933년에 가까스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동경상지대학 예과를 수료한 뒤 와세다 대학 문학부 재학 중인 193912월 항일학생운동으로 일경에 검속되어 옥고를 치루셨다. 1940년 와세다 대학 졸업 시에는 하이데거를 전공하였다가 뒤에 N. 하르트만으로 연구방향을 바꾸셨다. 1945년 민족의 염원이었던 조국 해방을 맞아 한국농민조합을 창설하고 조합장에 피선되어 한국농민운동의 효시가 되셨으며 1946년 부산자유민보를 창간 주필에 취임하고 같은 해 420일에서 23일까지 이 곳 안의에서 전국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하여 권력의 지방 분산과 자주적 자유연합을 크게 주창하셨다.

 

일제에 의해 말살된 민족주체성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공고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신 선생은 1947년 대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로 취임하여 학자로서의 일생을 출발하셨으며 이후 경북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동아대학교 초빙교수 계명대학교 대우교수 등을 1980년대까지 역임하셨고 그 사이 1951년에는 중등교육의 확대를 위하여 안의고등학교를 설립하셨다. 1961년에는 대구시 대학교육회 회장을 역임하신 바 있으며 1963년에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의 철학전문 학술단체인 한국칸트학회(현재의 사단법인 대한철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아 철학자들의 항구적인 연구활동무대를 마련 하셨다. 퇴직 후에도 평생에 걸쳐 철학연구에 매진하신 선생은 25권의 저서와 19권의 번역서 29편의 논문을 남김으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구업적을 기록하셨으며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철학자와 교수 교원들이 부지기수이다.

 

만년인 1987년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고문과 전국아나키스트 대회장을 역임하시고 1988년 세계아나키스트대회를 서울에 유치하여세계평화를 위한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시며 1989년 샌프란시스코 아나키스트대회 기조연설을 하시는가 하면 1990년 구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공식초청 방소 강연을 하시는 등 유년기부터 키워온 자유와 해방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셨다.

 

1990년 이후에는 한편으로 후학양성과 저술활동에 주력하여 대작조선철학사를 상재하시고 다른 편으로 국제평화협회 이사장을 맡아 기관지 [평협]의 편집인으로서 노동신문을 발행하여 근로자 대중에게 배포하셨다. 그러나 선생은 199723일 기관지 [평협]의 배포를 위해 집을 나서시다 마당에 쓰러져 이승을 떠나시니 향년이 86세이었으며 그 장례는 대한철학회장으로 봉행하여 지리산을 건너다보는 곳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늘밭에 안장하였다.

 

실로 선생은 세우신 학문과 닦으신 실천이 높고 맑아 고결하셨으며 곤궁한 자 허약한 자의 편에서 매사를 생각하셨고 산과 자연을 좋아하시어 순정純正 순일純一 순전純全한 기품으로 청빈한 한 생을 사시면서 한국현대철학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셨으며 실존적 자유와 인간적 해방의 실현을 위한 구도의 길을 걸으셨으니 그 뜨거운 학구정신과 강인한 실천의지를 추모하는 후학과 후진들이 이 유서 깊은 땅 안의공원에 돌 하나를 세워서 그 빛나는 삶을 길이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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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자는 하기락 門下內弟子로서 선생에 대한 존경의 은 결코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서술의 중립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는 하기락 선생에 대한 선생혹은 선생님이라는 존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1) 하기락(河岐洛)1912126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나 199723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서 타계하였다.

 

2) 대한철학회, 흔적(철학연구100집 기념 별책 부록), 정림사, 2006.11.30., 434~483.

 

3) 김주완, 하기락과 자유, 철학연구64, 대한철학회, 1998.02., 21~46.(200×162)

 

4) 시인 구상은 문단에 있어서 필자의 은사이시다. 필자는 구상 선생의 추천으로 1984 현대시학을 통하여 등단하였으며 그 후 선생을 사사했다. 구상과 하기락은 1987년 이때 당시 이미 35년 지기(知己)였다. 1953년 구상이 영남일보사 주필로 취임하고 동년 하기락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주임교수로 부임하면서 두 분의 교분이 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당시 하기락은 아나키스트 단체가 중심이 되어 설립(1946. 7. 7)된 독립노농당 경북특위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구상은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한 저항으로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펴내었다.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6년 후인 1959년에 이르러 구상은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대구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다 같이 비판적 입장에 섰던 두 분이 가까워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구상의 증언에 따르면 구상 자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지만 하기락이 주관하는 아나키즘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으며, 하기락의 고향인 용추계곡에서 같이 어울려 술추렴도 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대구 동인호텔 부근에서 두 분이 함께 하신 술좌석에 발표자가 배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두 분은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무척 재미있어 하였다. 구상은 하기락을 허유 형이라 호칭하고 하기락은 구상의 호인 운성(暈城, 구상 선생의 호는 잘 불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명이 常浚이며 은 필명인데, 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이라 불렀으며, 말씨는 상호간에 편한 높임말을 썼다. 두 분의 이야기 내용은 이러하다. 삼십 수년 전 경남 안의 용추계곡에서 여럿이 어울린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한창 흥이 고조되었을 때 남자끼리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하여 같이 어울릴 여성을 동원해 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 일을 해 낼 것인가 이었으며 바로 여기에 선발된 자가 좌중에서 외모가 가장 준수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기락과 구상이었던 모양이다. 두 분은 무거운 임무를 띄고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구상은 소득 없이 돌아왔고 잠시 후 하기락 은 한복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여성을 대동하고 점잖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성은 그날 그 자리에 참석 예정으로 있었던 어느 분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40대 전반과 30대 후반의 하기락과 구상의 호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자유시인협회의 심포지엄이 있은 1997725, 이 날로부터 한 달도 안 되는 같은 해 821일 대구 계명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자주인 연맹(Federation of Anarchists in Korea) 4차 대표자 회의에서 구상은 초청강연을 하게 되는데, 아마 속초에서의 이 만남에서 하기락이 초청하고 구상이 수락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5) 하기락 선생의 노후 생활을 보다 안락하고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자제분들이 다른 거처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하기락 선생 당신께서는 이것이 가장 편한 생활이라고 하면서 극구 거부하신 것으로 발표자는 알고 있다. 특히 장남인 하영석 교수의 부인께서는 하기락 선생의 맏며느리로서 시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효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하기락 저, 하기락 논문집4, 자유인연맹, 1987, 130.

 

7) 하기락, <나의 수업시대>, 하기락 논문집4, 자유인연맹, 1987, 3.

 

 8) 이 명제는 칼·마르크스가 기초한 국제노동자협회(l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창립(1864. 9. 28. 센트·마틴즈·홀에서 공개집회로 개최) 선언문에서 인용한 것임/ 하기락 편집, 平協』 Vol.1, No. 1, 국제평화협회, 1990.3.1. 6쪽.

 

9) 하기락은 속눈썹이 자라나 수정체를 찌르는 고통 때문에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병원에 나가 속눈썹을 뽑아내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성형외과에서 이에 대한 근본치료로서 쌍꺼풀 수술을 시술한 적이 있었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으며, 운명할 때까지 이 고통과 번거로움은 계속되었다.

 

10) 김주완 시집, 엘리베이터안의 20, 도서출판 한줄기, 1994, 83./ 하기락 편집, 자유연합6, 한국자주인연맹, 1989. 5. 1, 8.

 

11) 하기락, 하기락 논문집4, 자주인연맹, 1987, 6.

 

12)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 261-409. 참조.

 

13) 200268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 세워진 허유 하기락 박사 학덕비의 후면에 새겨진 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