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 갈증
김주완 시집
[저자 해제(解題)]
인간은 목마른 존재이다. 갈증을 숙명적으로 안고 태어나는 존재가 인간이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어머니의 젖을 문다. 어떤 이는 명예를 좇아서, 다른 이는 경제적 부(富)나 지식이나 사랑을 좇아서 그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평생을 바친다. 따라서 갈증과 해갈의 반복적 과정이 인생이다. 지식에 대한 갈증은 무지몽매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자 함이고, 돈에 대한 갈증은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갈증의 궁극적 지향점은 해방이고 자유이다. 자기의 의사나 의지에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유가 없이 세상 한가운데 문득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하나의 속박을 벗어나면 또 다른 속박 속으로 들어간다. 속박과 해방, 갈증과 해갈이 인간적 삶의 과정이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삶의 원동력이다. 그러한 과정을 이 시집은 풀어내고자 한다. 그것은 곧 “떨어지는 물방울의 사이(시 「적수간滴水間」)”에 있는 풀잎처럼 찰나적 존재인 인간과 그가 걸어가는 순간적 삶의 길에 대한 해명이 될 것이다.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국내도서 > 시/에세이 > 한국시 > 현대시
김주완의 시는 이성적인 철학적 사유思惟를 감성적인 시적 언어로 녹이고 변용해서 다채롭게 떠올린다. 동양 고전에서 따온 구절을 명제로 인유引喩하는 일부 시들은 현학적이며 이성적인 논리에 무게가 실리지만, 대부분의 시는 해박한 지식을 이면裏面에 깔거나 쟁이면서도 자신만의 언어로 부드럽게 풀어 보이려는 데 무게중심이 주어져 있다.
이 같은 시도와 그 흐름은 철학을 전공하는 시인으로서 ‘시 속의 철학’과 ‘철학 속의 시’를 함께 받들더라도 이성의 통로로 나아가는 철학적 관념(서사)들을 감성의 통로로 끌어가면서 승화하고 아우르려는 유연한 시적 지향과 추구에 무게가 옮겨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시집에 실린 일련의 시에는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듯 ‘언어=존재’라는 등식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의 집’ 짓기로 새길을 트고 다지려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특히 미세한 움직임과 아주 작은 소리에서 생명력을 천착해내고, 곡선과 둥긂의 미덕과 정적靜寂과 침묵의 세계를 그윽하게 길어 올리는 견자見者로서의 예지는 각별하게 돋보인다.
우주의 질서에 겸허하게 순응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사람을 향한 외경심과 따뜻한 신뢰도 남다른 그는 겸양지덕과 가톨릭적 사유가 어우러져 받쳐주는 사랑과 감사와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는 현대판 선비이자 이성을 감성으로 너그럽게 감싸 안는 관용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말]
아침 산책길에 달맞이꽃이 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달맞이꽃은 핀다.
강 언덕에 태풍이 몰려와 허리를 부러뜨리면
누워서도 고개 들고 핀다.
비 오는 날은 몸을 움츠리지만
이내 노란 웃음을 되찾는다.
기다림의 자태에는 허공이 묻어 있다.
기다림도 익으면 하늘처럼 넓어지나 보다.
이 시집에는
계절을 초월하며 피는 달맞이꽃들이 모여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귀하고 환한 달이 중천에 떠 있다.
강이 흐른다.
2023년 10월
김주완
[추천사]
김주완의 시집 『선천적 갈증』은 삶에 대한 총체적인 목마름의 표출이다. 온전하게 차지 않고 어딘가 비어있는 모자람을 채우기 위한 각고의 수행修行, 오랜 기다림의 끝, 그의 시적 개안이 눈부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 펼치는 시적 공간이 걸림이 없다. 그의 깊고 넓은 탐구와 편력이 시를 만나 새롭게 빛이 드는 정토의 세계를 열었다. 지난한 철학적 사유의 시적 승화를 일궈냈다.
시정의 경박함이 가신 고아한 경지가 “밤 깊어 지친 세상 끝에서 돌아와/ 다시 월오교를 걷는”(「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었다」) 구도의 길, 시의 길이 우리의 안을 밝게 해 준다. 특히 『주역 서문을 읽다』 이후 천착하는 동양의 도는 시 영역의 개척과 심화로 시의 품격과 위의威儀를 높여 주었으며, 우리 시의 새 경지를 열어주었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명관明觀이자 시관詩觀이 존재의 근원적 물음에 닿아 깨침의 기쁨을 맛보게 한다. 확 트인 시경詩境이 큰 물살을 이루어 푸근하게 젖게 한다. 시의 힘이 독보적이다.
― 박찬선(시인, 낙동강문학관장)
어떤 시인은 언어도단이라는 엄중한 교훈 앞에서 언어도통言語道通을 시도하는 구도자가 된다. 일찍이 구상 시인은 “그리스도 폴의 강”을 따라 그 긴 항해를 시작하였다. 제자 김주완은 이제 득도의 바다에 도달한 것 같다. 김주완은 묵묵부답 논리의 철책을 달맞이꽃, 국화, 땅찔레 등으로 빚어 만든 연금술의 언어로써 녹이며 우리네 하루살이 삶의 찰나와 영원이 잡종이자 하나임을 알려 준다.
시인의 영혼은 생래적으로 자유롭다. 아나키스트 허유 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김주완은 자유해방의 길을 “풀잎처럼 부드러운 저항”이라는 <선천적 갈증> 속에서 탐구한다. 그는 만물에 새 이름을 불러 주면서 모든 존재를 해방시키는 언어의 영혼인 언령을 믿는다. 김주완은 깨달음을 깨트림으로 이해하나, 그것마저도 능사가 아니라고 다시 허문다. “이제부터 자유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경지에 온 것이다. 시도詩道를 터득한 시철詩哲 김주완은 수시로 “고맙다”, “미안하다”라고 인사하며 살아가는 풍류도인風流道人이다. 그는 낙동강의 도도한 물결을 나지막이 퍼 올려서 시대의 목마름을 씻어 주는 청량한 해갈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 김성국(사회이론가, 부산대 명예교수)
[약력]
저자(글) 김주완
인물정보
대학/대학원 교수 현대문학가>시인
1949년 경북 왜관에서 태어나 구상 시인 추천으로 198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경북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계명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서양예술철학전공) 학위를 받았다. 시집 『구름꽃』(1986), 『어머니』(1988),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2013), 『그늘의 정체』(2014), 『주역 서문을 읽다』(2016)를 냈으며 시집 『그늘의 정체』로 세종도서 문학나눔(2015)에 선정됐다.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2004), 저서 『미와 예술』(1994),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1998) 외 다수를 냈으며, 논문 「시와 언어」(1994), 「문인수의 시 ‘간통’에 대한 미학적ㆍ가치론적 고찰」(1997), 「하기락과 자유」(1998), 「예술창작의 존재론적 본질」(2005), 「시의 정신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2006), 「시낭송에 대한 철학적 해명과 시낭송 치료의 가능성 모색」(2019), 「구상 강문학의 존재론적 본질」(2022) 외 다수가 있다. 제54회 한국문학상, 제31회 경상북도문학상, 제18회 경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한국문협 이사, 경북문협 회장과 대구한의대 교수로 총장 직무대리, 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국학대학장, 교무처장, 기획처장, 행정처장 등과 대구교육대 겸임교수, 대한철학회장, 한국동서철학회장, 새한철학회장 등을 지냈으며, 운제철학상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Ⅰ
역易 ______ 10
불학시 무이언不學詩 無以言 ______ 14
위지악 이선기인울爲之樂 以宣其湮鬱 ______ 16
적수세滴水勢 ______ 18
적수간滴水間 ______ 20
충내형외지위미充內形外之謂美 ______ 23
공심병空心病 ______ 24
조용한 의자 ______ 26
스킬 ______ 28
명관明觀 ______ 30
마음 ______ 32
마디론 ______ 34
집자集字 ______ 36
아주 작은 소리 ______ 37
곡선에 대한 회상 ______ 38
Ⅱ
만남 ______ 42
신록을 받다 ______ 44
저기 어디쯤 ______ 46
그녀라는 도시 ______ 48
왜관 아랫개에 대한 다큐 ______ 50
가온다 원근법 ______ 52
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었다 ______ 54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______ 57
기다리지 마라 ______ 58
국화꽃, 명화名華 ______ 60
여백을 앉히다 ______ 62
가을 어조 ______ 63
봉숭아여 안녕 ______ 64
지우기 ______ 65
비와 바람의 행장 ______ 66
Ⅲ
관觀 ______ 70
집중集中 ______ 71
화신花信 ______ 72
라일락 꽃향기 ______ 73
땅찔레 ______ 74
나비 ______ 75
반伴 ______ 76
양안兩岸 ______ 77
물 ______ 78
부조浮彫 ______ 79
잉아 ______ 80
빙어 ______ 81
나무뱀 ______ 82
전지剪枝 ______ 83
종지부 ______ 84
Ⅳ
근곡 선생의 달빛 조상彫像 ______ 88
산수몽山水蒙 ______ 89
박찬선 선생 ______ 90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 ______ 92
쾌도난마 ______ 94
물가의 나무 ______ 95
물가에 마을이 있습니다 ______ 96
요약 ______ 99
초록음자리표 ______ 100
치명致命 ______ 102
택호宅號 ______ 104
물바위 ______ 106
목자스럽다 ______ 108
이제부터 자유다 ______ 110
고맙습니다 ______ 111
│해설│ 이태수(시인)
철학적 사유, 예지와 관용의 시학 ______ 113
[시 소개]
경연에서 선조*가 물었다. “《주역》의 정전程傳과 본의本義 가운데 무엇을 먼저 익혀야 하느냐?” 한강이 대답하였다. “역易의 도道는 오직 소장消長의 이치를 밝혀 시의적절한 조처를 잃지 않는 것이니, 한갓 점占을 쳐서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것은 역易의 말단입니다. 그러니 정전을 먼저 익혀야 할 것입니다.”** * 선조 : 조선 제14대 국왕 ** 한강寒江 정구鄭逑(1543~1620)의 묘지명(허목 찬) 부분 |
주註 “방법은 앞서 가고 방법론은 뒤따라간다.”-니콜라이 하르트만 한강은 『주역周易』 의 두 부분, 점서占書(본의)와 철학서哲學書(정전) 중에서 철학서 부분을 먼저 읽어서 존재와 당위의 원리를 터득하라고 한다. ‘쇠하여 사라짐과 성하여 자라남消長’의 이치를 먼저 알고 적절한 조처를 찾는 단계에서 점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점서에 현혹되거나 괘상을 맹종하거나 맹신하는 폐단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괘상은 보조 자료 정도로 삼아서 읽는 이가 참고로만 하고, 역과 그에 대한 대처는 보다 높은 단계에서 찾아야 적절한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자였다. |
눈 밝은 자는 밝게 보면서 가고 미욱한 자는 맹목으로 헤매는데
유혹은 바람처럼 사방팔방의 나무란 나무를 모두 흔드나니
내일 부러질 가지를 미리 알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을
미래의 얼굴을 환한 거울처럼 보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널리 바뀌는 것을 주역周易이라 하나니
변화의 원리는
안에 있어 밖에도 있는 것인데
자연의 섭리 안에 무언가 밀고 들어가서
내일은 내일 나타나지만
기실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미리 만드는 것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저마다 제각각 만드는 것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깜깜한 갱도에서
보이지 않는 방도의 실마리를 찾아
더 깊은 어둠 아래로 채굴해 들어가지
역易에는 천지의 도道가 드러나느니
도道는 음陰이 되었다가 양陽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니
한번 하늘이 되었다가 한번 땅이 되었다가 하면서 만물이 태어나는데
해와 달이 돌고 돌면서 몸 섞이는 법칙을 도道라 하고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하니
역易은 곧 도道이니라
길이 먼저 태어나고 길 위에서 만물이 나타나느니
흐르고 바뀌는 것이 길이다
뒤의 물이 앞의 물로 바뀌는 것이 흐름이라
바뀌는 것은 이전의 지금이 다음의 지금이 되는 것이다
길은 굽이굽이 길게 구부러지면서
바뀌어 흐르기에 길이다
새 길도 옛길도 모두 길 위에서의 길이다
날마다 새 얼굴이 되면 살아있는 얼굴이어서
조처는
흐름의 방향을 새로 다잡는 일이니라
─「역易」 전문
따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남의 말을 따라 하고 남의 길을 따라 걷고 남의 달음박질을 따라 달음박질하면서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복제판, 표절은 그럴 듯했지만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똑같은 말, 똑같은 얼굴,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모두는 여럿이 아닌 하나가 되어 갔다 어제는 내일, 주고받는 것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었다 돌고 도는 돈처럼 유통이 오래 되면 될수록 너덜너덜 닳아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갈 때 아버지는 내게 시를 배우라고 했다 말을 얻으라고, 남의 말이 아닌 나의 말을 찾으라고 했다 자기만의 말다운 말을 할 때 자기만의 세상이 열린다고, 처음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이 시라고 했다
내 뜻대로 이름 지어 부르면 사물들은 성큼성큼 이름 안으로 걸어 들어와 새것이 되었다 사람들의 말을 쓰되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쓰기 시작하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넓은 세상 한가운데 말답게 말할 것이 있는 나는 내가 되고 반신半神**이 되었다
―시인은 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가 곧 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존을 내세우지 않는다 스스로 자존이기 때문이다 참시인은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와 그의 말이 곧 자유이고 해방이기 때문이다
*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답게) 말할 것이 없다 .─『논어』, <계씨편>
** “말로서 새롭고 완전한 세계를 건설해 내는 시인들의 언어는 예언하는 언어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은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그 중간에 내던져져 있는 반신半神이다.” .─M. 하이데거
─「불학시 무이언不學詩 無以言* ―시, 말, 시인」 전문
노년이 되면서 맑고 높은 음에서 눈물이 난다
청력을 잃은 음악가는 눈물의 높이에 음자리를 그렸을까
동굴 벽을 뚫고 나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어두운 바닥에 부딪혀 온몸이 부서질 때 비로소 가늘고 맑은 소리가 된다 술대를 튕기면 떨어지는 소리 한 방울 튀어서 귀먹은 가슴에 들어서듯이
안에서 밖으로 베풀면 안은 비워지고 넓어져서 편안해진다 집 안에 빈 하늘이 있고 빈 땅이 있어 그 사이로 해가 들어온다 따뜻하고 곧고 하얀 햇살들이 빈 구석구석을 밝히고 덥힌다 오, 베풂과 들어섬의 성스러움이여
높고 구성진 소리는 귓속의 어둠을 밝히며 가슴의 동공을 후려친다 터져 나온 강물이 굽이치는 설움의 물결
최고의 말은 무언이다 의미가 빠져나간 소리, 어둠을 밀어내는 소리, 막힌 벽을 뚫는 소리는 변질되지 않은 한을 품고 있다 오롯한 최상의 말은 수사가 없이 흐르는 음형상, 자유로이 유동하는 음악, 맨 처음의 순한 소리의 즐거움이다
빈 소리는 노래가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의미는 없고 소리만 있는 처음의 노래는 우우우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을 뚫어 통로를 낸다
가장 가늘고 가장 맑고 가장 높은 그는
처음부터 부드러운 눈물이었고 서늘한 바람이었다
* 음악은 갑갑하고 답답한 가슴을 뚫어 준다. .─한유, 『원도原道』.
─「위지악 이선기인울爲之樂 以宣其湮鬱*─음악」 전문
차곡차곡 쌓이더니 천장까지 닿았습니다 그리운 눈물일까요 곱디고운 분노일까요 벽이란 벽은 모두 은밀한 속이 되었습니다 가득 차서 부풀면 밖으로 터져 나옵니다 혼비백산 노래도 꽃도 모두 찬란한 해방입니다 막히고 답답한 것이 터져 나오는 폭발입니다 붉은 소리로 얼굴을 부수고 나오는 큰 웃음을 보셨나요 들판 가운데 홀로 똑바로 선 늙은 회나무의 늦은 출타를 만나셨나요
* 속이 충만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장재, 『정몽』, <중정>.
─「충내형외지위미充內形外之謂美*─이름디움」 전문
지난 계절은 회색이었고 마음은 안개처럼 갇혀 있었다
모든 풍경은 거울 속에 있었고 거울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의자는 완고하였고 아버지는 우울하였다 비밀스러운 유전은 조용하였고 용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니었다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의자는 절망에 이르지 않는다
절망은 대지진처럼 다가오고 절망의 절망은 홀로 선 나무 같은 내게로 되돌아온다 내가 내게로 보내는 조용한 절망만이 운명의 덧칠로 남는다
아직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지 않았다
저기 한 개인이 죽지 못해 아프다 절망은 영원으로 가는 문일 뿐 한 개인은 죽어도 절망은 살아서 남는다 영혼은 죽을 수도 없어서 다른 개별자에게로 옮겨 붙는 어둡고 숨겨진 육체의 가시
말씀이 믿음이고 믿음은 관계이니
33세의 그분은 안식일 전날에 책형을 당하고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셨다 아버지도 나도 이미 그 나이 너머를 걷고 있었다
고통과 불안의 먼 밤을 건너 와
속죄의 저편에서 절망으로 앉아 있는 의자는 빛 속에 여전히 조용한 의자로 육중하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지만 절망은 죽음에 이르지 않고 용서와 구원의 빛깔은 정적이고 침묵이니
*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서문 첫 문장(요한복음 11장 4절).
─「조용한 의자」 전문
너를 만나러 이 세상에 왔네
어디선가 들은 아련한 소리 익숙하여서
소리 속에 묻혀 소리가 되고 싶었네
너는 감미로운 음률이었고
어느 먼 하늘 끝에 있는 청량한 옹달샘이었네
내가 너무 일찍 왔거나
네가 너무 늦게 왔거나
우리는 사다리의 양 끝에 있었네
오르거나 내리면서
소리가 건너가고 소리가 건너오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끈이라 하네
꿈결 같은 바라봄이라 하네
손을 잡아야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네
같은 자리에 마주 앉아야만 만나는 것이 아니네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거기 가면 있다는 것을 안 그때로부터
우리는 이미 앞질러 만난 것이네
그러나 가끔은 우리도
서로의 길을 먼 바다처럼 바라보며
꽃무늬가 앉은 카페라떼를 마실 수 있다면
가슴 저리게 좋을 것이네
목화 꽃 속에 묻혀 목화가 되고 싶었네
옹달샘 속으로 들어가
살아서 반짝이는 눈부처가 되고 싶었네
허공을 맴도는 너의 부드러운 배회는
향기로운 음악이었네
─「만남」 전문
꽃을 보는 눈이 있었다
계절 밖에서도 꽃은 피었다
히말라야시다가 있는 붉은 벽돌집 정오의 정원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맑은 꽃잎을 처음으로 본 적이 있다 눈뜨는 봄날에 가지와 가지 사이 돌연한 냉이꽃 옆에서 책장을 넘기는 파리한 창조주가 있었다
물이 드나드는 길의 끝에서 가로수는 만나고
나는 섬이 되어 떠내려가면서도 꽃 피는 섬으로 눈길을 보냈다 섬의 큰 키와 휘날리는 머릿결은 가물가물 피어나는 붉은 구름 사이에서 물결처럼 출렁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해류가 바뀌는 길목마다 꽃은 몸으로 부딪히며 산이 솟듯이 터져 나왔다 해적선이 데려가는 꽃의 행로를 보면서 나는 꽃잎에 매달린 물방울 같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있었다
바다의 끝에 닿을 때까지 파도처럼 지지 않고 꽃은 피기만 할 것이다 흐르는 길을 따라 보는 이가 없어도 저 혼자 필 것이다
꽃은 질 때 꽃잎을 떨군다
─「왜관 아랫개에 대한 다큐」 전문
그날* 거기서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을 걸으며 길을 잃었다
달의 마을로 들어가는
달 뜨는 월오교**에 달 뜨지 않은 밤이었다
달 뜨지 않아도 눈부시게 밝은 밤이었다
내가 처음 목격한 백야에는
하얀 옥양목이 천지간에 펼쳐져 있었다
쉼 없이 하늘에서
하얀 목화송이가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
하얀 길 위의 나는 하얀 유니콘이 되어
눈부시게 하얀 키 큰 나무를 따라
긴 뿔을 쳐들고 하염없이 걸었다
방랑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으며
마음엔 꽃이 피는데
얼굴에는 까닭 모를 눈물이 흘렀다
발성을 잃어버린 나는 그러나 울 수가 없었다
시력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시력과 발성이
하얀 테두리의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눈길을 밟고 오는 순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사의 기척일 것이라 생각했다
눈길을 밟으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뽀드득 뽀드득
단단히 여미어 끌어당기는 찰진 소리가 났다
이리 와라 이리 와라
소리에 끌려가며 소리에 익숙해지다가
끝내 나는 청력까지 잃고 말았다
소리는 어느 곳에서는 귀를 열고
어느 곳에서는 귀를 닫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하얀 둘레의 블랙홀에 흡인된
사랑은 청맹과니
사랑은 벙어리
사랑은 귀머거리
몰라서 가는 아름다운 길이 사랑이었다
잠시 눈부시고 오래 슬프게 가는 길
나설 때는 황홀하지만
돌아올 때는 쓸쓸한 길이 사랑이었다
사방이 길인 하얀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떠돌지 않으며 서 있을 나무는 어디에도 없다
방랑은 그러므로 싱싱하고 절실하고 성스러웠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 길에서 길로 떠돌다가
밤 깊어 지친 세상 끝에서 돌아와
다시 월오교를 걷는
훗날의 무채색의 풍경화에는
속절없이 내리면서 끝까지 녹지 않는 눈이
거기 그렇게 여전히 하얗게 쌓이고 있었다
* 1965년 1월 28일, 왜관 삼성극장에서 순심중고등학교 졸업식(중17회/고11회)이 있었다. 그날 밤 적설량 10cm 이상의 눈이 왜관읍 일대에 내렸다.
**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아랫개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동정천의 마지막 교량이다. 강에 근접해 있는데 속칭 달오교라 부른다. '월오月塢는 '달이 뜨는 후미진 곳' 또는 '달마을'이란 뜻이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었다」 전문
[출판사 서평]
김주완의 시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반신半神’의 경지에서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듯 ‘언어=존재’와 ‘시=존재의 집’이라는 등식을 떠올리게 하는 세계를 지향하고, 그 세계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도 안겨준다.
어린 꽃나무가 앓고 있습니다 속에서 생긴 병인지 밖에서 온 병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들판의 서쪽에서는 여전히 싹이 틉니다 동쪽에서는 쉼 없이 고요하던 나뭇잎이 자꾸 무거워집니다 여기저기 기척이 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침이 되자 어린 꽃이 피어납니다 완연하던 병색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아주 작은 기도가 부풀어 올라 저리 터져 나온 것입니다 앓는 속도 꽉 차서 부풀면 팝콘처럼 터지는 것이지요 처음에 꽃은 모두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북쪽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데 아무도 듣지 못하는 아주 작은 소리가 있습니다 가장 먼 곳에서 출발하여 우주의 가장 낮은 곳을 떠받치는 아주 작은 소리는 구체적입니다 여자의 집 안팎에서 구석구석 꽃이 피고 꽃이 지며 생명이 살아가는 소리는 몸을 가졌습니다 붉은 마음을 가진 새가 작은 소리를 품은 채 남쪽에서 높이 날아오릅니다
─「아주 작은 소리」 전문
나는 콘트라베이스가 되어 배경 소리를 내었지요
멀리서 보는 가온다의 자리는 눈부셨지요
(중략)
나도 어느 자리에 앉아 구석의 음표가 되었지요
너무 높이 있거나 너무 낮게 있는 친구는
스스로 거리를 두면서 자꾸 멀어지고
우리는 같은 음계끼리만 만나곤 했어요
한 번 눈 먼 새는 영원히 날지 못해요
까마득 높은 소리와 아득히 낮은 소리가 만나
몸부림치면 심포니가 되지요
멀고 가까운 건 세계가 아니라 자리였어요
눈이 내리는 으뜸음 자리는 금세 녹아 버려서
누구도 머물지 못하는 영역이었지요
새벽이면 강으로 나가
날마다 물결치는 소리를 들었어요
─「가온다 원근법」 부분
「아주 작은 소리」는 들판의 서쪽에서 싹이 트고 동쪽에서는 나뭇잎이 자꾸 무거워지는 상황에서 앓고 있는 어린 꽃나무를 들여다보면서 착상한 듯한 시다. 아침이 되자 알아들을 수도 없는 기척으로 어린 꽃나무의 연원을 알 수 없는 병색病色이 사라지고 꽃을 피우는 모습으로 바뀌어진다. 이 상황 변화는 아주 작은 기도와 어린 꽃나무의 속이 꽉 차서 부풀어 올라 터져 나오는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처음에 꽃은 모두 북쪽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아무도 듣지 못하는 아주 작은 소리가 가장 먼 곳에서 출발해 우주의 가장 낮은 곳을 떠받치기 때문으로 그려진다. 이어서 여자의 집 안팎에서 꽃이 피고 지며, 생명이 살아가는 소리는 몸을 가졌다고 할 뿐 아니라 붉은 마음을 가진 새가 작은 소리를 품은 채 남쪽에서 높이 날아오르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쪽에서 싹이 트고 동쪽에서는 나뭇잎이 무거워지며 북쪽에선 여자의 몸에서 꽃이 태어나고 남쪽에서 마음이 붉은 새가 몸을 가진 작은 소리를 품은 채 높이 날아오르는 상황이 암시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더구나 생명력이 어린 꽃나무에서 여자와 새에게로 전이되고 비약하는 까닭은 ‘왜’일까.
동서남북을 두루 포용하고 있는 이 공간은 거시적인 시각과 미시적인 시각이 어우러져 빚는 생명의 근원과 그 불가시적인 생명력을 가시화하는 세계의 떠올림으로, 시인이 재구성해 보이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아침을 계기로 어린 꽃나무가 작은 기도와 기도에 힘입기도 한 충만감으로 생명력을 회복(발산)하고, 아주 작은 소리로 상징되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질서와 그 힘이 생명을 잉태하는 모성母性으로서의 여자와 비상하는 새를 통해 가시화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삶이 삶을 지우고, 죽음이 죽음을 지운다
열심히 거두고 채우면서 살아도
산다는 것은 짐짓 지우는 일
하루하루
나는 나를 지우고
당신은 당신을 지운다
가시는 가시를 지우면서 가시가 된다
─「지우기」 부분
시인은 “산다는 것은 짐짓 지우는 길”일지라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어둡게만 보지는 않는다. 비록 “오는 줄도 모르고 왔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가는”(「고맙습니다」) ‘오늘’(날들)이지만, 우러르고 사랑하고 가까이 교유交遊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그들은 “춤추는 하늘이었고/손닿을 듯 멀리 나는 바다” 같고 “천사였고 바보”(「이제부터 자유다」) 같은 경우도 있고, 그런 사람들과는 여전히 더불어 “내가, 내가 아니어도 되는 자유”(같은 시)를 누릴 수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이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시가 「고맙습니다」이다. 요즘 심경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듯한 이 시는 사랑을 바탕으로 감사와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는 관용의 메시지들을 아름답게 빚어 보여 그윽한 여운을 안겨 준다. 감사의 마음은 와서 가는 인생에 대해, 부모와 가족들에게, 마지막까지 고운 마음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낮게 마음 비움으로써 복을 받았다는 데로 스미고 번지며, 자신 때문에 아프고 슬프거나 손해 본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비는 마음이 곡진하게 쟁여져 있다.
오는 줄도 모르고 왔다가
가는 줄도 모르고 가는
오늘 나는 고맙습니다
나를 세상으로 보내주신 어머니, 아버지
고맙습니다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신 할머니, 누님 고맙습니다
모든 것을 두고 갈 수 있어서
나는 복을 받았습니다
임종을 하듯 나의 저녁을 살펴준 마음씨
고운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나로 인해 아프고 슬펐던 사람들
나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전문
[기본정보]
문학세계사
ISBN 9791193001301
발행(출시)일자 2023년 10월 11일
쪽수 144쪽
크기
131 * 218 * 17 mm / 399 g
총권수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