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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일보]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김주완 <압화>

김주완 2013. 12. 9. 19:15

압화押花 / 김주완

2013.12.0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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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질식을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신문지의 검은 활자가 내 코를 짓뭉개고

기름 짜듯 내 체액을 지긋이 뽑아갔다

 

롤러를 빠져나오는 국수 반죽처럼 몸이 평면으로 압축되면서

살아온 날들의 부피가 허공으로 빠져나갔다

사지 멀쩡하던 굴곡진 몸체가 허망하게 무너지자

싱싱하고 찬란했던 숨결이 몇 개의 활자들을 데리고 서둘러 나를 떠나갔다

 

압, 화,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나는 창씨개명 되었고

그들의 무심한 완상에 맡겨졌다

 

그러나, 숨을 멈추면서부터 편해지긴 했어

나보다 더

일사불란하게 창씨개명한 종이꽃을 보았거던

사무실 의자마다 앉은 그들은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치며 전자결재를 하고 있었지

 

그래도,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죽은 채로 죽지도 못하고 무망하게 살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싶어

누가 나를 갈부수어 가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흔적 없이 하얗게 망각되고 싶다

-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문학의 전당,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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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이번 네 번째 시집은 지난 세 번째 시집 이후 19년 만이다. 긴 시간 그의 전공인 철학 속에 ‘매몰’되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시 쓰기에 전심전력하기가 어려웠던 탓일 게다. 하지만 강의와 연구에 쫓기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본향인 시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희미한 소명이 늘 꿈틀거렸다고 한다. 전공분야인 존재론적 예술철학에 천착하면서도 관심은 늘 시의 존재 해명에 머물러 있었다. 「문인수 시 ‘간통’에 대한 미학적 가치론적 고찰」은 시 한 편을 분석하여 220매로 쓴 철학논문이며, 「시의 정신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는 시치료에 대한 국내 최초의 철학논문이다.


시인의 아포리즘은 ‘철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시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단에서 은퇴한 이후 펴낸 이번 시집의 시들은 거의 철학 너머의 깊은 사유들을 담고 있다. ‘압화’ 역시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자연에 대한 오만불손함을 꼬집는 시로 읽혔다. 꽃 누르미는 오늘날 단순한 취미가 아닌 신개념 예술의 영역을 넘볼 만큼 각광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 대상인 꽃의 처지에서 보면 죽을 지경이다. 아니 이미 교살된 몸에서 ‘체액을 지긋이 뽑아’가고, ‘국수 반죽처럼 몸이 평면으로 압축되면서’ 멀쩡하던 사지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갖고 놀자는 수작이 아니고 무언가. 죽음도 자연의 한 현상인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별난 완상을 위해 이렇듯 자연사할 기회마저 앗아가 버린다.


압화는 본디 의학연구를 위해 약용식물의 표본을 만드는데서 비롯되었다. 앙증맞은 아름다움에 유달리 감각이 발달된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었는데, 1997년 고양 꽃박람회에 일부 압화가 전시된 것이 관심을 끈 최초의 계기였다. 물론 이보다 먼저 ‘조화’란 것도 존재했고 ‘종이꽃’도 있었다. 향기 없는 차가운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꽃도 사람도 다 자연의 일부이다. 시들지 않은 척 거짓웃음 짓는 박제된 꽃, 사라지지 않고 눈만 뻐끔한 미라 인간은 얼마나 끔찍한가. ‘흔적 없이 하얗게 망각되고 싶’은 자유를 붙들어 납작하게 짓누르는 것, 그야말로 억압이고 압제 아닌가.
(권순진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