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자유주의/허유 하기락 선생 기념사업회

2025 학회_허유의 ‘자주인’사상을 생각하며_김 창 덕(국민문화연구소 회장)

김주완 2025. 5. 1. 22:00

1부 특별기획_(프로시딩 37~39)

 

 

허유의 자주인사상을 생각하며

 

김 창 덕(국민문화연구소 회장)

 

 

 

무엇보다 이 자리에 서서 감히 허유 하기락 선생께서 평생 사유하고 실천하신 자주인개념에 대해 말씀드린다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일본 아나키즘 문학을 조금 들여다본 정도에 불과하며, 선생과 직접 뵌 인연은 물론, 그분의 저작을 깊이 있게 읽은 경험도 부족합니다. 그런 제가 허유 선생의 사상을 논한다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망설임이 앞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국 교수님의 권유와 격려 덕분에 부족한 식견이나마 용기를 내어, 허유 선생의 사상 중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자주인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허유 하기락 선생은 해방 이후 한국 아나키즘의 주요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자주인'이란 개념을 강조하며 자신의 행동 철학으로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이것은 아나키즘이야말로 개인과 공동체의 자율성과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사회 실현의 철학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 권력이나 강제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사유와 행동을 의미하고 나아가 개인이 타인과 협력하며 자율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른 전제 조건으로 우리 자신이 늘 스스로 깨우쳐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허유는 자주인이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강조했습니다.

우선 정신적인 독립입니다. 이것은 국가나 권력의 이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생활의 자립입니다. 즉 경제적 자립, 공동체 속에서 자율적 노동을 통한 생존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협동입니다. 이것은 강제나 위계가 아닌 자발적인 연대와 협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허유의 자주인일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지금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본주의에 대한 허유 하기락의 시선은 어떨까요? 허유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타자에게 종속시키는 체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임금노동의 구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자본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자주인의 삶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하에서의 물질 중심의 가치관은 이윤과 소비를 중시하므로 인간을 수단화하면서, 주체적인 자주인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마지막으로 계급구조가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는 불평등한 계층구조를 강화하여 자주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한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인간은 진정한 자주인의 삶은 이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허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은 진정한 자주인으로 살아가기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이에 허유는 실천적 대응으로 자주인에 의한 대안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주인들이 모여 이루는 아나키즘적 이상 공동체였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관계, 그리고 공동체 중심의 협동 노동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외부의 강제 없이 내면의 윤리에 따른 삶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야말로 자본주의와 국가 권력 모두에 대한 대안이며, 자주인들의 이상적인 공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이상 역시 실천의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것은, 그 고통을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나누고 감내하며, 어떻게 자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함께 모색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허유 선생이 꿈꾸었던 자유인의 삶! 그것은 결코 먼 과거나 추상적 이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다시 묻고 실천해가야 할 현재적 과제라고 믿습니다.

 

여담으로 자주인사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제 나름의 의견을 잠깐 언급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자주인 연맹은 1972, 최갑룡 선생을 중심으로 하기락, 정화암, 회관, 우관 등의 인사들이 함께 결성한 조직입니다. 하지만 그 뿌리는 단순히 1972년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출발을 1946420일부터 23일까지, 경남 안의에서 개최된 전국 아나키스트 대회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보다 앞선 1945929, 해방 직후 귀국한 국외 망명 동지들과 출옥 동지들이 모여 결성한 자유사회건설자연맹도 중요한 전거로 작용합니다. 이는 현 국민문화연구소의 전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안의대회의 결의에 따라, 194677, 독립노농당이 유림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여 결성됩니다. 이때 발표된 결당 선언문은 자주인 연맹의 사실상 출발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노농당은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해체되며, 이후 수많은 곡절 끝에 1972622, 서울 진관사에서 자주인 연맹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72년이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아나키즘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탄압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이는 1910년대 일본의 대역 사건 이후 아나키즘의 변화와도 매우 유사한 흐름입니다. 즉 초기의 일본 아나키즘은 비전 운동, 증세 반대 운동, 그리고 식민지 정책과 아시아 침략에 대한 강한 비판을 중심으로,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투쟁적 노선을 지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26명의 동지가 희생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1920년대 일본 아나키즘을 국가나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운동에서 개인의 자각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아나키즘의 궤적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해온 많은 아나키스트는 6.25 전쟁을 기점으로 운동의 지속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자신을 더 이상 아나키스트라 칭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력을 숨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남쪽에서는 보도연맹 사건이나 4.3 사건 등으로 수많은 동지가 목숨을 잃고 북쪽에서도 사상적 이질감 속에서 동지들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직접 봤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시기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더 이상 머물 곳을 잃고, 운동 이력을 지운 채 평시민으로 생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 역시, 더 이상 국가나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운동은 극심한 탄압과 희생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하게 되었고, 결국 아나키즘 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주제인 자주인 사상으로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주인 사상은 기존의 체제 전복적 투쟁이 아닌, 개인의 자각과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중심을 둡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시기 아나키스트들이 암울했던 시절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고, 동시에 한국 아나키즘이 맥을 잇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